[비즈엔터 이은호 기자]
가수 박지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그의 분투는 조용했으나 쉽게 꺾이지도 않았다. ‘성인식’이 씌운 ‘섹시 여가수’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박지윤은 지금 자유롭게 노래한다. 다른 누구의 뮤즈도 아닌, 박지윤 그 자신으로서.
Q. 축하해요. 새 음반 ‘오(O)’가 지난 16일자 네이버뮤직 오늘의 발견 코너에 소개됐어요.
박지윤: 와, 정말요? 아직 확인을 못했는데…. 다행이네요.
Q. 7집 ‘꽃, 다시 첫 번째’(2009) 이후 줄곧 평단의 호평을 얻었어요. 부담이 되진 않나요?
박지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은 있는데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마음은 없어요. ‘잘 되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그러고 보니 ‘잘 된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네요. 혹자는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게 ‘잘 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제겐 행복하게 음악을 하며 사는 게 ‘잘 되는 것’이에요. 그래야 오랜 시간 음악을 할 수 있기도 하고요.
Q. 호평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는 아쉬워요. 곡을 많이 알리려는 욕심도 크지 않은 것 같아요.
박지윤: 음반을 알리는 것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곡을 발표하는 행위 자체가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하지만 방식을 다르게 하고 싶어요. 꼭 TV에 나와야 홍보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더구나 요즘엔 라이브로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남아 있지도 않고요. 제게 잘 맞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물론 나가고 싶죠.
Q. 음반 얘기를 해볼까 해요. 준비해둔 곡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두 곡을 고른 기준은 뭐예요?
박지윤: 날씨의 영향이 커요. 너무 더운 날씨는 부담스럽거든요. 제 노래가 대부분 조용한 분위기인데다 가사도 무거운 내용이 많으니까요. ‘기적’과 ‘오(O)’은 가사 내용도 사랑스럽고, 특히 ‘기적’은 그나마 템포가 빠른 편이라 봄에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Q. ‘기적’은 박지윤의 노래 중 손에 꼽게 행복한 분위기의 노래에요. 들으면서 혹시 당신이 연애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웃음)
박지윤: 지난 번 음반보다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감이 붙은 상태에서 작업했어요. 여유 있게 들을 수 있는 경쾌한 분위기의 곡을 만들고 싶었죠. 행복한 분위기는 어느 정도 의도된 셈이에요.
Q. 악기 편성이 인상적이에요. 피아노와 더블 베이스를 활용했죠. 작업에 참여한 피아니스트 조윤성과 더블 베이시스트 조윤성 모두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잖아요. 섭외는 어떻게 했나요?
박지윤: 클래식한 악기들을 많이 활용했어요. 조윤성씨는 윤종신씨의 ‘저스트 피아노’ 음반 작업을 하며 알게 됐어요. 당시 제가 ‘목격자’란 곡을 불렀는데, 그 때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다졌죠. 이번 음반 작업은 제가 먼저 요청했어요. 성민제씨는 조윤성씨가 소개해줬고요. “더블베이스로 바이올린, 첼로 등 모든 현악기의 소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다”더라고요.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명성대로 훌륭한 연주를 들려줬어요.
Q. 반면 타이틀곡 ‘오’는 사랑노래인 것 같으면서도 쓸쓸한 분위기가 읽혀요. 여러 가지 정서로 해석될 수 있는 곡 같아요.
박지윤: 기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지만, 그 안에 불안한 감정이 깔려 있어요. 그래서 뮤직비디오에도 바다가 일렁이는 모습을 담았고요.
Q. 방금 불안함이 있다고 말했어요. 혹시 나이가 들면서 불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던가요?
박지윤: 극복해가는 과정이 달라졌죠. 어렸을 때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똑같이 미쳐버릴 것 같아도 겉으론 태연한 척 할 수 있게 됐어요. 어려움을 넘어가는 방법을 좀 더 쉽게 찾아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태연한 ‘척’일 뿐이지, 불안한 감정에 태연해질 순 없는 것 같아요.
Q. 감정은 불안할지언정 음악은 아름답죠.
박지윤: 성격상 불안 혹은 분노와 같은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해요.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은 아니거든요. 수줍음이 많고 한 발짝 뒤에서 물러나 있는 편이라, 음악을 만들 때에도 돌려서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Q. 가사에 “그대가 있음에 내가 되어요”라는 표현이 나와요. 박지윤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건 무엇인가요?
박지윤: 간지러운 얘기이긴 하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외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사랑이 필요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못했을 때 망가지는 것 같아요. 엄마, 친구, 연인,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그것이 저를 완성해줘요. 지금까지도 그랬고요. 비록 불안한 사랑이었을지언정, 그 시기의 나를 채워줬던 건 사랑이에요.
Q. 심지어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해도요?
박지윤: 네.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는 이별과 아픔도 다 포함돼 있는 거니까요. 결국 아픔 역시 나를 완성시켜주는 존재죠. 어쩌면 사랑보다 더욱 큰 성숙을 가능하게 해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해서 아픔을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만(웃음),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Q. 아픔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려요.
박지윤: 아뇨. 의연한 것과는 다른 문제에요. 똑같이 아프죠. 그렇지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Q. 계획대로라면 작년 가을 정규 쯤 정규 음반이 나왔어야 해요.
박지윤: 미스틱엔터테인먼트(이하 미스틱)에서 독립하고, 음반을 혼자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정규 음반을 낼 생각이었는데, 그러려면 정말 많이 늦어질 것 같았어요. 그리고 한 음반에 여러 곡을 담다 보면 묻히는 곡이 많잖아요, 한 곡 한 곡에 무게를 두고 싶었어요.
Q. 미스틱에서는 왜 나온 거예요?
박지윤: 음반에 대한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어요. 타협을 해야 했는데, 음악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어요.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타협이 불발된 거예요.
Q. 덕분에 포기하게 된 부분도 있겠죠. 가령, 아까 얘기했던 ‘홍보’와 같은.
박지윤: 소속사, 편리하죠.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은 되는데. 그걸 놓고 혼자 해나간다는 게 사실 만만치는 않아요. 그럼에도 저를 움직이게 한 건, 결국 제 자아(自我)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제가 고집이 센 편도 아니고 내향적이라 스스로 자아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독립을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니, 저는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과거에 저와 맞지 않은 옷을 입었을 때 그렇게 힘들었단 것도 알게 됐고요.
Q. 섹시 스타를 거쳐 인디뮤지션으로. 분명 가요계 전무후무한 행보예요. 좋은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을 거고요.
박지윤: 아이, 그런 거 없어요.(웃음)
Q. 하하. 그렇지만 지금 활동 중인 아이돌 후배들에겐 당신의 행보가 좋은 선례가 될 거예요. 언젠가 회사의 품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할 때, 당신을 보며 ‘저런 길도 있구나’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박지윤: 그렇게 봐주면 고맙죠. 하지만 ‘좋은 본보기가 돼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내 삶을 꾸리다 보면 그 또한 큰 불행이에요. 제가 지나온 길이 궁금하다면 저는 언제든 얘기해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물어볼 사람이 없었거든요. 잘 나가는 아이돌 스타의 삶을 거쳐 자신의 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 쉽게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몇 마디 말만으로도 굉장히 큰 힘이 됐을 텐데…. 막막했죠. 그래도 요즘 애들은 똑똑하잖아요.(웃음)
Q. 1994년에 데뷔했으니 벌써 23년 차네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예인으로 사는 거, 어때요?
박지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좀 별로에요.(웃음)
Q. 별로에요? 연예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 있지 않나요?
박지윤: 글쎄요. 뭐가 있을까요?
Q. 대부분의 가수들은 ‘무대’를 꼽죠. 내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잖아요.
박지윤: 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인생의 3분의 2를 연예인으로 살았어요. 그러면서 다양한 일을 겪었고요. 큰 무대에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의 삶도 있었고, 지금처럼 그냥 ‘음악인’으로 사는 삶도 있죠. 연예인으로서는 좋았던 것보단 포기한 게 많았어요. 유명세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요.
Q. 만약 데뷔 전으로 돌아간다면 박지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박지윤: (연예인을) 안 했을 거예요. 음악은 훗날 다른 방법으로 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나이에 다시 연예인으로 데뷔하라고 한다면, 제가 선택권을 쥐고 있다면, 안 하죠.
Q. 하지만 그 때가 있었기에 뮤지션 박지윤도 존재할 수 있던 것 아닌가요?
박지윤: 그렇죠. 다시 음악을 시작했을 때, 제 과거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가 아니었잖아요. 장단점이 있었어요. ‘연예인’ 박지윤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저를 ‘음악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성인식 박지윤’으로 인식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유명세의 덕을 본 것도 있어요. 그래서 ‘만약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과 같은 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Q. 지금, 뮤지션으로서의 삶은 어때요?
박지윤: 행복해요.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체가 돼서 나만의 것을 만든다는 게 참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요. 행복한 일을 하고 있죠.
Q. ‘여가수’로서의 삶은요?
박지윤: 쉽지만은 않아요. 30대의 여자 가수가 자기 음악을 한다, 현실적으로 불안한 일이에요. 남자 가수들은 달라요. 소비층 대부분이 여성 팬들이니까요.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죠. 어쨌든 지금은 행복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해나갈 수 있을 만큼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