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많은 이들이 동경해마지않는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속살은 그러나, 징글징글한 정글이다. 냉혹한 쇼비지니스 세계는 많은 이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내주지 않는다. 도약대에도 이르지 못하고 일찍이 도태되거나 스러져간 배우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그런 세계에서 30년 동안, 그것도 대중의 관심에서 한순간도 멀어지지 않고 활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혜수를 만나러 가는 길. 그녀가 일궈놓은 견고하고도 꾸준한 세계가 새삼 경이롭게 다가왔다.
영화 ‘굿바이 싱글’은 톱스타 김혜수가 20년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톱스타 고주연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눈길이 가는 작품이다. 김혜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녀에게도 그녀의 팬들에게도 각별한 작품일 터. 그러고 보니 과거 ‘청순의 대명사’로 책받침에 등장했던 김혜수는 이젠 건강하고 섹시한 여성의 아이콘으로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김혜수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세월은 그녀에게 다양한 이미지를 씌우고 벗기고, 부여해 오고 있다. 그 속에서 김혜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Q 긴 릴레이 인터뷰의 마지막입니다. 기쁘시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자들을 만난다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김혜수: 아니요. 전 좋아요. 영화를 두고 이렇게 얘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요.
Q. 하하. 최근 진짜 기뻤던 일은 뭐예요?
김혜수: 제가 영화 ‘차이나타운’을 끝내고 바로 ‘굿바이 싱글’ 촬영에 들어갔어요. ‘차이나타운’ 캐릭터를 위해 찌운 살을 찌웠는데, ‘굿바이 싱글’은 배우 역할이어서 체중을 많이 감량해야 했죠. 힘들었어요. 제가 대식가거든요.(웃음)
Q. 대식가요? 얼마나 먹길래요.
김혜수: 아주 많이. 진짜 아주 많이 먹어요. 그런데 ‘굿바이 싱글’이 끝나고 연달아 드라마 ‘시그널’과 영화 ‘소중한 여인’ 촬영에 들어가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김밥 한 줄 제대로 먹기 힘든 스케줄이었죠. ‘소중한 여인’ 촬영이 끝나고야 드디어 2주 정도의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영화 촬영 마지막 날, 훠궈 집에 가서 엄~청 먹었어요. 그때가 가장 좋았어요.(웃음) 홍보 일정 때문에 다시 체중을 조절해야 했지만요.
Q. 체중 관리는 배우의 숙명이군요.
김혜수: 그러니까요. 체질이라도 타고나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Q. 체중 감량의 고통을 안긴 ‘굿바이 싱글’ 이야기를 해 볼까요? 톱스타 김혜수가 톱스타 고주연을 연기했습니다.
김혜수: 직업적으로 뭔가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어요. 전혀 다른 직업군을 연기할 때는 자료조사를 많이 해요. 전문가 도움도 받고요. 그런데 이번엔 반대로 자문을 많이 받았어요.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영화 속 설정에 대해 “진짜, 이래요?” 묻더군요. 그럼 저는 “실제 우리 업계에서는 이래요”라고 팁을 주곤 했죠.
Q. 그 팁들, 좀 알려주세요.(웃음)
김혜수: 이슈가 될 만한 사건사고가 터졌다 쳐요. 그럴 때 배우 개인의 진짜 반응과 대외적인 반응이 있죠. 그 배우를 서포트하는 매니지먼트의 실제 반응과 케어하는 반응이 있을 테고요. 제작보고회나 기자회견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올 법한 제스처와 멘트를 꽤 많이 준비 했어요. 가령, 기자회견에서 말실수 하는 주연(김혜수)을 바라보며 매니저들이 ‘얘기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안타깝게 외치는 장면. 그럴싸한 상황이에요. 위기에 처했던 톱스타 지훈(곽시양)이 상황이 역전되자 기자들 앞에서 하는 말들, “저를 끝까지 믿어주신…” 누구겠어요? 뻔하죠. 가족 아니면 팬들이잖아요?(웃음) 그리고 “내가 번 돈으로 (위기를) 내가 막았잖아”라는 주연의 말에 김대표(김용건)가 이렇게 반박하죠. “너 혼자 번 돈 아니다.” 매니저들이 그 장면을 본다면, 아마 합창을 하며 ‘맞다’고 외치지 않을까 싶어요. 상황을 유쾌하게 그리긴 했지만, 비현실적인 걸 과장하지는 않았어요.
Q. ‘굿바이 싱글’은 10대 미혼모라는 다소 뜨거운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입양대상아동과 미혼모를 위한 자선 사진전에 참여해 오신 걸로 알아요. 개인 관심사가 이번 영화 선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요?
김혜수: 아이를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해요. 하지만 그것이 작품 선택의 주요 이유는 아니었어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 가장 끌렸던 건 ‘진심’입니다. 솔직히 ‘굿바이 싱글’은 영화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익숙한 공식을 따라가는 영화죠. 하지만 그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진심 같은 것들이 마음에 와서 ‘콕콕’ 박혔어요. 그리고 이 시나리오를 처음 받은 게 3년 전인데, 당시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유사한 지점을 영화에서 발견했죠. 나 역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큰 위안을 받고 있었거든요.
Q. 물어봐도 되나요? 당시에 겪었다는 일.
김혜수: 미안해요. 그건 굉장히 사적인 부분이라. 짐작하겠지만, 좋은 일은 아니에요. 그때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내 편, 내 사람, 나를 지켜주는, 그리고 나를 살리는 사람들. 조금 과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감정은 진짜 그랬어요. 그래서 ‘굿바이 싱글’이 제겐 각별하게 읽혔죠.
Q. 코믹 연기는 오랜만입니다. ‘굿바이 싱글’은 김혜수가 코미디도 능청스럽게 소화해 내는 배우였다는 걸 새삼 증명하는 영화죠.
김혜수: 고주연은 많은 걸 갖춘 듯 하나 미성숙한 여자에요. 그 동안 쌓아 올린 명성이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외적인 도움에 의한 것임을 잘 아는 인물이죠. 그 불안감이 굉장히 큰 여자고요. 한마디로 결핍덩어리에요. ‘굿바이 싱글’은 그런 철없는 인물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기편을 찾는 이야기죠.
Q. 그런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는 배우들이 적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쌓아 올린 명성이 본인의 실력 덕분인지, 운이 따른 것인지, 확신하기 쉽지 않다고 보거든요.
김혜수: 세상에 운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저는 믿어요. 하지만 운만으로 어떤 긴 시간이 절대 증명되지는 않아요. 운만으로 가능하다면, 열심히 노력할 시간에 ‘점방’을 가겠죠.
Q. 오래 가는 배우는 이유가 있다?
김혜수: 이유가 있겠죠. 그 이유가 대단할 수도 있고,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음… 그런 생각은 들어요. 위대하고 대단해 보이는 것들이 눈에 띄긴 해요. 하지만 저는 사소한 어떤 것들이 그런 큰 것들을 압도한다고 믿어요. 그건 한 가지는 아닐 거예요.
Q. 열일곱에 데뷔했으니, 이젠 배우 김혜수로 산 기간이 더 많은 셈이에요. 처음부터 이 길이 내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 의심을 접고 진짜 내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지점이 있을까요.
김혜수: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이 길이 제 길인지 모르겠어요. 제 의지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고…또 그러기엔 너무 어렸죠. 한때는 일과 저 개인을 분리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죠. 저는 이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성장했어요. 제 가치관, 제 세계관, 제 취향 모든 걸 영향 받았기 때문에 굳이 분리시켜서 ‘일은 일, 나는 나’ 라고 하는 게 굉장히 무의미하더라고요. 꽤 오랜 시간 배우로 살았음에도, 배우로서 제가 자질이 있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나, 부대껴’ ‘너무 벅차!’ 그런 느낌이 오히려 컸죠.
Q. 여전히 연기라는 우물을 파는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군요.
김혜수: 어떤 시기에 들어서면서 타인이 나를 ‘어떤 배우’로 규정하는 것보다, 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어요. 그건 대외적인 평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저는 아직 그 과정에 있어요.
Q. 스스로에게 박한 느낌이 있어요.
김혜수: 없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저희 일이라는 건, 대중들 앞에 전면적으로 나서서 소통을 하는 거잖아요. 대중이 나를 봐주지 않고 “됐어. 제발 이제 그만!” 하면, 그만 해야 하는 거예요. 제가 열심히 했다고 해서, 내 인생을 바쳤다고 해서 계속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이라도 ‘그래, 이게 내 길이야’ 라고 깨닫는다고 해도, 저희 직업자체가 미래에 대한 결정권이 없어요.
Q. 하…결정권이 없다고 느끼며 이 일을 하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김혜수: 어딘가를 떠날 때,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경우보다 머무르고 싶지만 떠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아요. 가령 명예 퇴직하는 분들. 청춘을 바쳐 일했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접어야 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잖아요. 반대로 대외적인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본인이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동력이 없다면 그것도 아니죠. 그건 자격상실 인거죠
Q. ‘굿바이 싱글’은 배우와 매니저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영화를 보면서, 몇 년 전에 읽었던 ‘별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라는 에세이가 떠올랐어요. 당신의 매니저로 15년을 함께 한 전 싸이더스HQ 박성혜 이사가 쓴 책이죠. 해당 에세이에 당신을 향한 그녀의 애정이 흘러넘쳤던 기억아 나요.
김혜수: 우리에겐 애틋한 무언가가 있죠. 처음을 함께 시작했으니까요. 서로 부족했던 시절, 많이 의지했고 싸우기도 하면서 청춘을 함께 통과했어요. 지금도 각별해요.
Q. 2011년에 tvN 드라마 ‘꽃미남라면가게’에 카메오 출연을 한 적이 있어요. ‘김혜수가 어쩐 일로 카메오를?’ 했는데, 드라마 제작자로 변신한 박성혜 대표의 작품이더군요.
김혜수: 맞아요. 저는 사실 인연으로 일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분은 그래도 될 사람이에요. 강한 믿음이 있죠. 지금 함께 하는 파트너(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이정은 대표)도 그래요. 저의 본질을 이해하는 파트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것 같아요. 일을 하다 보면 본질보다 우선시 되는 게 굉장히 많아요. 비즈니스가 개입되기도 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우선시 되기도 하죠. 그런데 매니저가 배우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면의 고민과 비전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거거든요. 그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천만 영화를 저 대신 판단해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보여 지는 게 다가 아니니까요. 어쩌면 이면이 더 크고 더 중요해요. 이면을 어떻게 잘 유지하고 잘 확장해 나가는가가 질적인 것을 좌우한다고 믿어요.
Q. 오랜 기간 배우로 살면서, 고주연처럼 일탈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나요.
김혜수: 왜 없었겠어요.(웃음) 그런데 그건 외부에 노출되는 직업이어서는 아니에요. 어떤 시기에 내 의지와 충돌하는 일이 있을 때, 그런 욕망을 느끼죠.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을 억지로 수행해야 할 때, 그에 대한 반감이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게 감정적인 것이든, 잠재적인 것이든, 저도 그랬던 시기가 있었죠.
Q. 드라마 ‘시그널’의 무전기가 지금 당신 손에 있다고 가정해 봐요. 그 무전기로 과거의 김혜수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시기의 김혜수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나요.
김혜수: 일단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면, 제 첫사랑과 무전을 하고 싶네요.(일동웃음) 음. 과거의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제 자신에게 박해요. 그럼에도, “그래도 너니까 이만큼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부족하고 몰라서 헤맸던 적이 많아요. 하지만 그 순간 제가 가진 최선을 다하긴 했던 것 같아요. 그것밖에 안 될 때도 있었고, 그 이상이 될 때도 있었죠. 이건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연기를 못해서 헤맸던 시간, 아마 제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을 말이기도 하고요.
Q. 최근 스크린에서만 활동해 온 많은 영화배우들이 TV 복귀를 검토하는 분위기입니다. 그에 반해 당신은 TV와 스크린 두 쪽을 꾸준히 조율하며 달려온 느낌이에요. 최근에는 ‘시그널’로 큰 사랑을 받았죠. 3년 전 출연한 ‘직장의 신’도 반응이 뜨거웠고요.
김혜수: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경계는 없어요. 우리나라 시장도 좁은데, 경계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매체 특성이 다른 건 있죠. 많이들 드라마는 대중과 피드백을 바로 할 수 있어서 좋지 않냐고 하시는데, 그것도 대중의 호응을 얻는 작품을 만나야 가능한 것 같아요. 최근에는 운 좋게 그런 작품을 만났지만, 앞으로도 만나리란 보장은 없죠. 저는 너무 좋지만, 대중들에게 호응을 못 얻는 작품을 만날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그것이 나쁜 것이냐! 그렇지는 않아요. (흥행) 결과가 나쁘더라도 (과정이) 아름다울 수 있죠.
Q. 많은 인터뷰에서 타인에게 선입견을 갖는 걸 경계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더군요. 반대로 타인이 당신에게 지니는 선입견도 있을 겁니다.
김혜수: 어떤 것들인지 자세하게는 몰라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건 알죠. 가령 ‘김혜수는 당당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아요.(웃음)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Q. 당당하다, 섹시하다, 쿨하다, 솔직하다…
김혜수: (손뼉 치며) 솔직해요! 저는 그 순간 느끼는 대로 말하는 편이긴 해요. 그런데 솔직하다는 것과 거침없다는 건 좀 다른 것 같아요. 당당한 것과 매사에 자신이 있다는 것도 다른 것 같고요. 저는 솔직하긴 하지만 거침없지는 않아요.(웃음) 당당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 순간 자신 넘치지도 않고요.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잖아요.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Q. 본의 아니게 미디어에서 만든 것도 있을 테고요.
김혜수: 네. 제가 지닌 어떤 포인트가 더 강조되거나 부풀려져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하죠. 부각된 면을 보고 대중이 나를 판단한다고 해서, 기를 쓰고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타인이 느끼는 것까지 제가 통제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Q.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김혜수라는 이름이 지니는 상징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멋있는 배우’ ‘롤모델’로 꼽기도 하죠.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김혜수: 그런데 이러고 있다가 실없는 이유로 무너질 수 있어요. 만약 그렇더라도 상처받지는 마세요.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