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1세대 아이돌 중 연기자로 인생 이모작을 캐고 있는 이들은 ‘매우’ 많다. 그 중 연기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이들은 ‘적당히’ 있다. 그 중에서 아직도 가수 활동을 하는 이들은 ‘드물지만’ 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해체나 재결합을 겪지 않고 아이돌의 위치를 지켜온 연기자는? 딱 한 명 있다. ‘유일’하다. 에릭이다. 이것은, 에릭이라는 신화.
에릭이 ‘신화’ 멤버로 가요계에 데뷔한 것은 1998년이다. 신화의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집 ‘해결사’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활동을 접고 절치부심. 2집 ‘T.O.P’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인기가 따랐다. 팬이 늘었다. 그렇게 신화는, 젝스키스-H.O.T-god와 함께 1세대 아이돌 인기 전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시간은 그 자체로 운명이다. 영원히 ‘아이들’일 수 없는 ‘아이돌’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변화를 요구 받는다. 뮤지컬 무대로, 스크린으로, 드라마로… ‘탈 아이돌’ 선언이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1세대 아이돌들에겐 그러한 전례가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곧 기준이 될 뿐. 더군다나 당시는 아이돌 그룹 멤버가 개별 활동은 한다는 것이 ‘금기’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다. 대중은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노래하던 아이돌이, 갑작스럽게 현실세계에 착지해 어색한 연기를 하는 것에 반감을 드러냈다. 인기를 이용한 무임승차라 여겼다. 그러니까 ‘아이돌 출신 연기자’라는 수식어 자체가 공격과 편견의 대상이었던 시절이다. 에릭이 연기에 뛰어든 건, 바로 이 때다.
에릭은 2003년 MBC 드라마 ‘나는 달린다’의 건달 역할을 통해 연기 세계에 입문했다.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다. 당시 소속사였던 SM 플랜에 의한 것이었다. “즐겁지 않은 일을 오기 하나로 버틴” 에릭은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아마도 한참 후에야 깨달았을 테다.
어쨌든, 신화에서 떨어져 나와 배우로 활동하는 초반의 에릭은 분명 애매했다. ‘나는 달린다’ 이후 출연한 MBC 드라마 ‘불새’(2003)에서 에릭은 “뭐 타는 냄새 안 나요”라는 드라마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기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배우로서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 무렵 그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스크린에도 진출했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가 붕 뜨는 느낌을 줬다. 영화에서 에릭은 내내 겉돌았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언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에릭이 연기를 조금 즐기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드라마 ‘신입사원’(2005)에 이르러서다. 이 드라마에서 에릭은 기존의 멋스러운 캐릭터들과 달리 털털하고 코믹한 강호를 연기했다. 그 스스로가 “나와 가장 비슷한 캐릭터”라고 말했던 강호는, 에릭에게 연기에 대한 어떠한 부담을 덜어준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7년, KBS 드라마 ‘케세라세라’에서 만난 강태주. 돌아보면 ‘케세리세라’의 강태주는 훗날 ‘로코킹으로 불리울 남자’ 에릭의 연기 스타일을 미리 엿볼 수 있는 하나의 힌트였다. 이전까지 지나치게 폼 잡거나 코믹하거나 상투적인 면모를 보여 온 에릭은, 이때를 기점으로 일상성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남자에 머물지 않았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소심한 면모로 남성들의 마음도 대변할 줄 아는 남자가 됐다. 이러한 면모는 KBS ‘연애의 발견’(2014)과 tvN ‘또 오해영’(2016)으로 이어지며 에릭을 에릭답게 했다.
그 커다란 눈에서 불안이 감지될 때, 알량한 자존심과 진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적이 면모를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대중은 에릭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릭은 결코 감탄을 자아내는 연기력을 지닌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이 어떤 것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 맞는 옷 안에서 어깨에 힘주지 않고 연기해 낼 줄 아는 배우가 됐다. 이는 19년의 세월이 에릭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기도 하다. 에릭이라는 신화는 지금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