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때가 있다. 이민호에게 영화가 그랬다. 그는 30대가 되고 나서야 관객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나이,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이 생기는 나이가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암살자(들)'은 그가 서른이 넘긴 뒤 처음 만난 영화다. 1974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영부인 저격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이 작품에서 이민호는 동성일보 신입 기자 한영일을 연기했다.
광복절 기념식 취재를 위해 현장에 있던 영일은 저격 사건과 함께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다. 억압적인 시대에도 자신의 주관을 잃지 않는 열정과 패기의 기자다.

최근 비즈엔터와 만난 이민호는 '암살자(들)'의 유해진, 박해일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고 털어놨다. 탄탄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배우 사이에서 튀지 않으면서도, 한 명의 인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그는 박해일을 통해 배우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배웠다. 고뇌하고 많은 짐을 짊어진 어른의 모습과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소년의 모습이 공존하는 배우라고 느꼈다.
"인간 오디오북 같았어요. 영화가 관객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중간에서 가장 담백하게 전달하는데 굉장히 최적화되어 있는 배우라고 느꼈어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선배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울 게 많고 존경하는 선배님이에요."

유해진에게서는 다른 방식의 배움을 얻었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모든 회차에 현장을 찾는 모습 자체가 이민호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고, 짧은 순간에도 오랜 시간 쌓아온 배우의 날것의 힘을 느꼈다.
"해진 선배님이 모든 회차에 오셨어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안 갈 수 있겠어요. 하하. 영화 안에서는 같이 만나는 신이 많이 없었지만 찰나의 순간 눈에 살기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어요. 그 날것의 느낌을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이어오고 계신 거 같아요. 야생성과 날것의 느낌을 계속해서 간직하면 살아가는 게 정말 어려운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촬영장을 '도서관'에 비유했다. 허진호 감독은 여러 번 촬영하는 감독이 아니었고 '오케이' 사인을 하는 편도 아니었다. 한 장면을 촬영한 뒤 현장이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런 현장에서 이민호가 만들어야 했던 한영일은 정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억압받는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이민호는 영일에게서 당시로써는 시대를 앞서간 젊은 세대, 지금으로 치면 'MZ세대'와 닮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허진호 감독 역시 그에게 활어 같은 느낌을 주문했다.
"대본을 봤을 때부터 영일은 제가 느끼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고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역할이라 생각했어요. 활어 같은 느낌을 주려고 계속 움직이고 에너지를 계속 표출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민호는 영일을 단순히 에너지 넘치는 젊은 기자로만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영일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라 전체가 들썩이는 사건 속에서도 영일의 시선은 쉽게 주목받지 못하는 피해자를 향했다. 사건의 크기보다 그 안에서 사라질 수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기자였다.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왜곡되는 지점들이 아주 많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소통에 목말라 있는 저의 개인적인 지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주목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있었는데 그 피해자에 관한 언급이 최소한이 되는 상황이 불평등하다고 영일은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런 인간적인 저널리즘을 추구했던 게 제가 생각했던 영일이라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는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정서에 끌리고, 성공과 욕망, 그리고 지키고 싶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배우로서도 익숙한 모습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계속 더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배우로서 ‘못 봤던 느낌’, ‘신선하네’라는 평가가 가장 만족스러워요. 뭔가 달라졌는데 뭔지는 모르겠고, 무언가 계속 첨언 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해요. 이번 현장을 통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