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은호 기자]
어른이 되는 과정은 신기하다. 거대한 사건이 들이닥쳐 인생을 뒤흔들어야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소한 시간이 퇴적해 어른을 만든다. 주춤거리고 비틀거리면서 나아간다. 그리하여 긴 시간이 나서고 나서야 알게 된다. 내가 언제 어른이 됐는지.
가수 백아연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어른이 되는 길목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계산 없이 지어보이던 순한 웃음은 예전과 같았지만, 백아연이 고요한 소용돌이를 지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고 백아연은 말했지만 그녀가 ‘사람들 시선 따위’ 하며 코웃음 치는 날이 조만간 찾아오지 않을까 상상했다. 짜릿한 상상이었다.
백아연은 지난달 29일 네 번째 미니음반 ‘비터스윗(Bitter Sweet)’을 발매했다. 타이틀곡 ‘달콤한 빈말’은 전작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나 ‘쏘쏘’와 마찬가지로 ‘썸’ 단계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설렘을 동시에 그려낸 곡이다. 발매 직후 국내 주요 온라인 음원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소감 차트 개편 이후 처음 신곡을 내는 거라 성적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했어요. 그동안 쭉 싱글만 내다가 오랜만에 미니음반을 낸 건데, ‘과연 수록곡까지 많이 들어주실까’ 걱정했죠. 다행히 많은 분들이 노래를 골고루 사랑해주셔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당초 지난 1월 음반을 낼 예정이었지만 소속사 내부 일정상 컴백이 미뤄졌다. 계절이 달라지면서 음악도 달라졌다. 기존에 준비 중이던 음반에는 낮은 채도의 발라드곡이 다수 담겨 있었지만 ‘비터스윗’은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완성됐다. 백아연은 “계절감에 맞는 노래를 담느라 여러 번 수정을 거쳤다”고 귀띔했다.
노래가 그리는 여인의 모습은 전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상대의 빈말에 속지 않겠노라 선언하면서도 공허함에 허탈해 하거나(‘달콤한 빈말’), 애매한 관계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연락이 오면’) 식이다. 그래서 백아연의 노래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자존심을 굽히기는 싫고, 그러면서도 깔끔하게 뒤돌아서지도 못하던 풋사랑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런 노래, 이런 가사를 만들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생각하고 내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느끼는 걸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음반 곳곳에 제 솔직한 모습이 많이 담겨 있어요.”
수록곡 ‘질투가 나’와 ‘넘어져라’는 백아연이 직접 가사를 쓴 곡이다. 그는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드러났던 것 같다”면서 “이번에는 상황이나 감정을 한 문장으로 간결하게 정리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제 노래 대부분이 밝은 멜로디에 씁쓸한 가사를 담고 있잖아요. 언젠가는 씁쓸하고 외로운 멜로디에 씁쓸하고 외로운 가사가 담긴 노래를 쓰고 싶어요. 요즘 드는 생각인데, 제가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더라고요. 기분이 업 되어 있을 때 보다는 다운됐을 때의 제가 저의 진짜 모습에 가깝다고 느껴요. 그래서 다운된 톤의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백아연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노래를 쓴다. 마지막 연애는 4년 전. 연애 금지 조항 같은 건 없지만 워낙 ‘집순이’인 탓에 오히려 회사에서 ‘밖에도 나가고 클럽에라도 가라’고 말할 정도란다. “저도 이제 연애 좀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백아연은 강아지처럼 순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혼자 있는 게 싫은데 혼자 있는 게 좋아요. 헤헤. 말이 어렵게 느껴지나요? 친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어색한 공기가 싫어요. 견디려고 애쓰다 보면 제가 너무 괴로워져요. 그래서 (연애가) 잘 안 되나 봐요. ‘달콤한 빈말’은 연애가 잘 안 될 때 상대를 원망하기 보다는 ‘나는 왜 안 될까?’라고 자책하는 쪽에 더 가까운 노래에요. 실제 저도 그런 편이고요. 일이 잘 안 될 때는 어떠냐고요? 비슷해요. 스스로를 힘들게 해요. 고집이 덜 세다고 해야 할까요.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편이에요.”
하지만 지금 백아연은 타인의 시선과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중이다. 최근에는 일생일대의 일탈을 했단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는지 늘 성실하게 보고해오던 그가 ‘나 여행 다녀올 거야’는 말만 남긴 채 훌쩍 부산으로 떠났다. 여행 내내 비가 내려 호텔에서 야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게 전부였지만, 백아연은 “멋있게 다녀온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당황해 하시더라고요. ‘갑자기 웬 여행이니? 많이 힘드니?’ 걱정하셨는데 ‘그냥 갔다 올게’ 하니까 이해해주셨어요.”
음반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백아연이 작사한 ‘질투가 나’와 ‘넘어져라’ 모두 박진영 프로듀서로부터 ‘유치하다. 음반에 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혹평을 받았던 곡. 하지만 백아연은 자신이 왜 두 노래를 쓰게 됐는지, 왜 두 노래가 발표돼야 하는지를 장문의 메시지에 담아 박진영을 설득했다. 박진영의 반응은 의외로 쿨했다. “그래. 네 생각대로 하자.”
“제 얘기를 솔직하게 들려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박진영) 피디님에게 ‘저의 참여도가 높은 노래입니다. 제 요즘 상황이 이렇고 제가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서 느끼는 감정이 이렇습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어요. 굉장히 숙고해서 보냈는데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음반에 넣자)’고 바로 답을 주시더라고요. 제 의견을 관철시킨 거니까 책임감이 더욱 커졌어요.”
백아연을 무디고 단단하게 만든 데에는 앞서 겪었던 슬럼프가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지난 2012년 SBS ‘K팝스타1’을 통해 얼굴을 알린 그는 데뷔 음반 ‘아임 백(I'M BAEK)’과 두 번째 EP ‘어 굿 보이(a Good Boy)’를 연달아 발표했지만, 이후 2년 간 공백기를 가졌다.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를 내기 전에 2년 정도 공백이 있었어요. 내가 뭣 때문에 음반을 못 내고 있을까, 모든 게 제 탓 같았어요. 자신감은 점점 없어졌고요. 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어요. 책도 많이 읽고 생각나는 것들을 틈나는 대로 메모하면서 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러면서 살아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제법 선배다운 모습으로 ‘K팝스타6’ 출신 가수들에게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그는 “노래 하나, 무대 하나만 보고 달려오던 시간을 지나, 데뷔 이후 즐거움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면서 “그럴 땐 내가 좋아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노래를 할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생각해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러고 있다. ‘K팝스타’를 할 때 내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계속 떠올린다. 그게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이제 뭔가 알겠다는 느낌은 아니에요. 다만 예전에는 생각을 빨리 해야 하고 대답도 빨리 해야 한다는, 항상 신속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생각과 말이 얽히기도 했어요. 이제는 조금 더 차분해진 것 같아요. 저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덕분인 것 같아요.”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와 ‘쏘쏘’를 잇는 2017년 백아연표 봄 발라드 ‘달콤한 빈말’”이라는 음반 홍보 문구는 과거의 백아연과 지금의 백아연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노래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담고 있는 감정은 물론 비슷하다. 하지만 백아연은 지금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할 속도로 달라지고 있다. 언젠가 긴 시간이 지나면 알 것이다. 그가 언제 어른이 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