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하 교수]
믿지 못해서일까 믿고 싶지 않아서일까. 북한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은 ‘설마’하는 정도의 관심 또는 무관심 수준에서 흘려보내곤 한다. 호기심 역시 ‘음모론’ 정도의 수준에서 맴돌다 사그라들기 쉽다. 수십 년간 베일에 싸인 은둔의 세습체제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통 사람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어느새 설마 하던 핵무기 위력은 현실로 다가와 있고, 통일보다 전쟁이란 단어가 훨씬 많이 등장하는 세상이 돼 버렸다. 이런 변화를 영화나 다큐멘터리 작품들도 반영하고 있는 걸까. 북한을 둘러싼 ‘설마’ 하던 일들이 영화 속 가상현실로, 다큐멘터리 속 진짜 현실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8월 개봉한 ‘VIP’, 지난해 10월 개봉한 ‘그물’, 2013년 개봉한 ‘붉은 가족’ 등이 북한을 모티브로 가상현실을 그렸다면, 지난해 9월 개봉한 ‘연인과 독재자’, 2015년 공개된 ‘프로파간다 게임’, ‘나는 선무다’는 모두 사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VIP는 국정원과 CIA의 기획으로 북한에서 온 ‘기획귀순자’이자 북한 지도층의 귀공자인 VIP 김광일(배우 이종석)이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을 복합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밀정’, ‘싱글라이더’에 이어 워너브러더스가 메인투자를 맡은 세번째 한국영화인 VIP는 20여 년 전 남한 전체를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이한영과 수지킴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이한영 살인사건은 1997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아파트촌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버젓이 자행된 권총 살인으로 온 국민에게 충격을 줬던 사건이다. 당시 범인을 잡지 못해 미결사건으로 분류됐으나 이후 북한의 공작원 왕문성(공작명 이순호)를 포함해 3인이 벌인 일이며, 이들이 버젓이 북한으로 돌아가 영웅 취급을 받았다고 밝혀졌다. 수도권 중심지, 그것도 주택가에서 북한 공작원이 사람을 죽이고 유유히 북한으로 돌아갔다니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한국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며 성형을 하고 이름을 이한영으로 바꾼 그의 본명은 이일남. 김정일 첫째 부인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로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른바 로열패밀리다. 김정일 첫째아들로 올해 초 비운의 죽음을 맞은 김정남과는 사촌지간으로 어린 시절 뿐 아니라 스위스 유학도 같이 갔다. 82년 스위스 유학 도중 미국으로 가고 싶다며 한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그는 죽기 전까지 한국 정보당국의 도움으로 경제생활과 취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방탕한 사생활과 생활고로 돈을 벌기 위해 일부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고 ‘대동강 로열패밀리’라는 책을 써 북한의 실상을 알리면서 존재가 노출됐고, 이후 죽음을 맞았다.
수지킴 사건은 1987년 1월 한국인 윤태식씨가 홍콩에서 부부싸움 도중 부인 수지킴(한국명 김옥분)을 살해한 뒤 북한의 간첩사건으로 위장한 어이없는 사건이다. 살인이 벌어진 뒤 16년 후인 2003년에야 당시 제5공화국 정권과 정보당국이 ‘여간첩 남편 납북기도사건’으로 조작했음이 법원에 의해 확정됐다. 법원은 수지킴 가족들에게 42억 원을 배상할 것을 판결했고, 정보당국 역시 사건 조작에 대해 공식 사과하면서 영화보다 더 허무맹랑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영화 VIP는 감독과 배급사 측의 설명이 없으면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이 사건들을 ‘소재’로만 활용한 것 같다. 수지킴 살인사건과 같은 뻔뻔하고 잔인한 여성살인과 북한 귀공자의 생활상은 영화속에서 경각심이나 교훈을 일으킬 만한 사건으로 떠오르기 보다는 어둡고 잔혹한 느와르의 재료 정도로 녹아 든 느낌이다. 영화는 여혐 등 여러 논란에 시달리면서 손익분기점(BEP) 250만에 한참 못 미치는 140만 관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영화 ‘그물’과 ‘붉은 나라’는 김기덕 감독이 각각 감독과 제작을 맡은 작품으로 특정 역사를 모티브로 표방하고 있지는 않다. 그물은 북한의 어부 남철우가(배우 류승범) 낚시배가 고장이 나면서 남한으로 건너오고,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그물 같은 덫에 걸려드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모습과 분위기는 상반되지만, 남한 정보당국과 북한 군부 모두 강압적으로 자백을 강요하고, 달콤한 회유책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인공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강압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붉은 가족’은 남한에서 행복한 가족으로 위장해 살고 있는 네 명의 북한 공작원 이야기를 그렸다. ‘암호명 진달래’, 조국을 배반한 탈북자들을 살해하기 위해 남파된 이들 모두 잔혹함을 무릅쓰고 철처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들 앞에 자유분방하고 무질서한 한 가족이 등장하고, 이들은 서서히 새로운 일상에 물들어간다. 계속되는 지령과 인간적 양심사이에서 서로 갈등하는 북한 공작원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물’은 5만 여명을, ‘붉은 가족’은 4000명에 못 미치는 관객을 동원했다.
극 영화가 북한 내외부에서 일어날 법한 가상현실을 그렸다면, 최근 공개되고 있는 다큐멘터리들은 미스터리로 남았던 사건의 진실들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말 개봉한 ‘연인과 독재자’는 70~80년대 희대의 미스터리로 남았던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슈퍼스타 커플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을 실제 육성과 증언으로 파헤쳤다.
1978년 1월11일, 홍콩으로 여행을 떠난 최은희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얼마 후 그녀를 찾으러 홍콩으로 떠났던 신상옥 역시 행방이 묘연해진다. 납치부터 자진 월북, 사망, 부산에서 장사한다는 소문까지. 북한이 개입된 사건 중 이보다 ‘설마’ ‘카더라’가 많이 등장한 사건이 또 있었을까.
실종 후 8년2개월이 지난 1986년 3월, 오스트리아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한 신상옥과 최은희는 2개월 후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 당했고,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망명한 그들을 바라보는 국내의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고, 1999년 한국으로 온 이후에도 한국 정부와 영화계는 두 사람을 외면했다.
탈출한지 무려 20년이 지난 후 공개된 이 영화는 주인공 최은희의 최근 인터뷰 뿐 아니라 신상옥,김정일 등의 육성을 통해 지나간 의혹들을 파헤친다.
홍콩에서 이상희라는 북한 공작원이 최은희에게 접촉한 뒤 배를 태워 북한 김정일에게 데려가고, 남편인 신상옥마저 데려가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하고 세뇌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광이라 불릴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통해 통치력과 정통성을 극대화하려던 김정일이 두 사람을 데려왔음을 자백한 육성도 그대로 실렸다.
2015년에는 ‘프로파간다 게임’과 ‘나는 선무다’라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프로파간다 게임’은 알바로 롱고리아라는 스페인의 영화제작자가 북한을 직접 방문에 국가 선전기구를 보고 해석하는 내용을 담은 동영상 일지 형식의 다큐멘터리로, 직접 평양과 일대를 방문해 촬영하고 인터뷰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주된 내용이 북한 측의 선전을 담고 있지만,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영상 속에서 북한체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2015년 DMZ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된 ‘나는 선무다’는 90년대 후반에 탈북, 서울에서 김정일 체제에 대한 풍자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탈북으로 비롯된 아픔을 극복해 가는 북한 선전원 출신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담았다. 미국인 아담 쇼버그 감독이 만들었고, 제작국가는 중국이다.
북한에 관한 세 다큐멘터리 모두 외국인의 손으로 외국인 자본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한국과 관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냉담했다. 영국인 감독 로스 아담, 로버트 캐넌이 메가폰을 잡고, BBC가 투자했으며, 미국의 매그놀리아픽쳐스가 배급한 ‘연인과 독재자’는 최근 ‘공범자’들과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배급하는 엣나인필름에서 국내 배급을 맡았다. 하지만 2016년 9월과 10월 두 달간 6765명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고, ‘프로파간다 게임’과 ‘나는 선무다’는 배급사 없이 영화제에 소개되는 수준에 머물렀다.
북한을 둘러싼 기상천외한 영화적 사건들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해외 제작자와 투자자들, 그들은 한국 사람들의 무관심에 또 한번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믿지 못해서일까 믿고 싶지 않아서일까. 한국은 아직, 북한에 관한 진실이 소비되기에는 이른 시장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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