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문'은 모두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사실들 사이의 빈틈에 주목했다. 익숙한 인물들과 사건들 사이사이를 감독과 배우들의 상상력으로 채워 흥미로운 이야기를 완성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감독 허진호, 이하 천문)'는 조선의 하늘과 시간, 같은 꿈을 꿨던 두 천재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장영실이 처음 세종의 눈에 띄어 관노 신분을 면하고, 세종의 총애를 받은 것부터 임금의 가마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위기를 맞이하기까지 긴 시간을 천천히 좇는다.

'천문'에는 자격루, 간의 등 우리가 아는 장영실의 발명품부터 남자 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고,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한글을 만든 세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위인, 세종과 장영실의 이야기란 점에서 '천문'은 친숙하다. 여기에 한석규와 최민식이라는 연기 고수가 각각 세종과 장영실을 맡았다. 실제로도 절친한 두 사람이 스크린에서 내뿜는 연기는 관객들이 영화에 낯가릴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금세 두 사람이 들려주는 세종과 장영실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익숙한 것들 사이사이 새로운 것들이 포진해있다. 왜 세종은 내관보다 가까이 두던 장영실을 멀리하기 시작했을까. 왜 장영실은 임금의 가마 '안여'를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을까. 왜 안여 사건 이후 장영실은 역사에서 사라졌을까. 허진호 감독은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사실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호기심들을 엮어, 상상력을 발휘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허진호 감독은 세종과 장영실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며, 자신이 상상한 두 사람의 관계를 관객들에게 설득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백성들을 내려다 봐야 하는 왕과 고개를 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노비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고, 서로를 마주보는 과정을 애틋하게 그려냈다. 벽돌을 쌓듯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세종과 장영실의 감정선은 영화 말미 벗 이상의 감정마저 느끼게 한다. 허진호 감독의 대표작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와 비교했을 때 흠잡을 수 없는 아름답고도 슬픈 엔딩이다.

감독의 상상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배우들이다. 한석규는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한 차례 세종대왕을 연기한 바 있으나, '천문'의 세종은 익숙하면서 또 다르다. 장영실과 꿈과 별을 논할 때 한없이 다정한 눈빛과 백성보다 명분과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신하들을 결단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의 온도차가 한석규의 두 번째 세종을 설명한다.
최민식은 "역사 영화는 다큐가 아닌 만드는 사람의 재해석"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최민식 표 장영실로 관객들을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종을 위해 강녕전 창호지에 별을 그리는 장영실은 정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며, 세종에게 인정 받고 싶고 한글이 아닌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원하는 모습에선 마치 어린아이 같다. 또 백성을 위한 미래를 꿈꾸는 세종을 위해 기꺼이 곤장을 맞으려 하는 충신의 면모까지 '천문'의 장영실은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천문'은 역사의 행간을 채워 낯익으면서 낯선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에 한석규·최민식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자신들의 색을 입혀, 생동감 넘치는 팩션(faction)의 좋은 예를 만들었다. 12월 26일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