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일 방송되는 KBS1'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우리 기억에서 지워진 대구의 ‘그날’과 미군정, 그리고 친일 경찰의 연결고리를 살펴본다.
◆ 해방 후 한반도에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일제에 협력하며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경찰로 재탄생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사람들은 또다시 경찰의 강압적인 쌀 공출에 시달리며 배를 곯아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최대 적이었던 일본제국. 그 식민부역자들을 다시 기용한 미군정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1946년 10월, 대구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쌀이 아닌 경찰의 총탄이었다.

일본 패망 후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은 1945년 10월 ‘쌀의 자유판매’ 정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매점매석이 횡행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찾아오자 미군정은 다음 해 1월 일제강점기와 같은 ‘쌀 공출’을 단행한다. 불과 5개월 만에 뒤바뀐 정책으로 인해 혼란은 가중되었고 해방 1년 후 한반도는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를 맞게 된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의 부녀자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턱없이 부족한 식량 배급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노동자들이 총파업 시위를 벌이며 가세하자 대구 시내는 수천 명의 열기로 끓어올랐다. 무자비한 경찰의 총탄에도 불구하고 이날 대구의 함성은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해방 후 조선인들에게 가장 큰 민족 과제로 떠오른 것은 바로 친일 청산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 상륙 다음 날 ‘조선의 일본인 관리들을 잔존시킨다’는 폭탄선언을 하는 등 한국인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펼친다. 미군정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 관료와 경찰들까지 통치에 적극 활용한다. 당시 고위 경찰의 82%가 조선총독부 출신자에 이를 정도였다. 수많은 한국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왜 친일파를 재활용하려 했던 걸까?
201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발견된 일명 ‘버치 보고서’에 당시 미군정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숨어있다. 미군정 최고사령관 존 하지의 정치 고문이었던 버치 중령이 한반도에 머물며 남긴 메모들에는 과연 어떤 진실들이 담겨 있을까? 버치 보고서를 최초 발굴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직접 소개한다.
◆ 지워지지 않는 상처, 대구10월사건
74년간 우리 역사에서 잊힌 대구10월사건. 이념적 편견과 오해로 유족들에게 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까지 이어지는 항쟁의 도화선 ‘대구10월사건’, 그리고 ‘친미’ 경찰로 다시 태어난 친일 경찰 이야기는 18일 오후 10시 KBS1 '역사저널 그날'의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 1946년 대구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