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꼬무'에서 흰장갑 무리들이 시위 중인 YH무역 여공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한 사건을 다뤘다.
2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장항준, 장성규, 장도연이 '101호 작전, 흰 장갑의 습격'을 이야기했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신문사 사진부 박태홍 기자는 마포 거리에서 '흰 장갑'을 낀 남자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이날 새벽 '흰 장갑'들에게 피해를 입은 건 박 기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집단 테러에, 무려 15명의 기자와 국회의원들, 그리고 수백 명의 젊은 여성들이 끔찍한 피해를 당했다.
공포의 흰 장갑들이 휩쓸고 지나간 그날 아침, 마포구 도화동 신민당사 내부는 아비규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깨진 유리창과 박살 난 집기들, 그리고 건물 한쪽 구석에는 여성용 신발 수백 켤레가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사건의 배경은 이랬다. YH무역 회장은 5년 만에 무려 400배가 넘는 성장을 일궈냈다. 직원 대부분을 비교적 저렴한 임금의 여공들로 채용해 이익을 냈다. 그런데 YH무역이 갑자기 폐업 해고 통보를 했고,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해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집단 행동을 벌이자 회사 측은 기숙사에 있던 이들을 협박하기 위해 회사 측은 단전, 단수를 감행했다. 여성들은 기숙사에서 탈출해 신민당사로 향했다. 야당이었던 신민당 의원들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청와대에서는 긴급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청와대 긴급 회의 결과 YH 무역 노조를 강경 진압하기로 결정됐다. 중앙정보부랑 경찰은 '101호 작전'에 돌입했다. 앞서 박 기자에게 피해를 입힌 '흰 장갑'이 바로 101호 작전에 투입된 경찰들이었다.
경찰이 사건 당일 신민당사에 들이닥쳤다. 당시 YH 무역 노조는 결의 대회를 진행 중이었다. 결의 대회가 끝나갈 때쯤 김경숙이 나서 연설을 펼쳤다.
그런데 김경숙은 '101호 작전' 중 추락사로 비명횡사했다. 경찰은 급하게 사인도 제대로 유가족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장례와 화장을 초고속으로 진행했다.
다른 여직원들은 경찰 조사 후 강제 귀향을 당했다. 그렇게 의혹을 남긴 채 김경숙 죽음은 묻혔다. 그런데 김경숙의 죽음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다.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을 선언, YH무역의 강경 진압을 허락한 박정희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했다. 김영삼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됐고, 그는 "아무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쳤다.
김영상 의원의 제명에 부산과 마산에선 시민들의 항쟁이 일어났다. 이후 박정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았고, 유신정권의 마지막을 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