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사건. 학교 역사 시간에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그 비극이, 이번엔 '이름'이라는 가장 사적인 언어로 스크린에 되살아났다.
영화 '내 이름은'은 1998년과 1949년, 두 개의 봄을 교차시키며 제주 4.3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름'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역사적 비극의 통로로 삼은 선택이 영리하다. 촌스럽다는 이유로 콤플렉스가 된 소년의 이름, 그리고 반세기 넘게 가슴속에 묻어둔 어머니의 1949년이 맞닿으며, 개인의 서사와 역사의 비극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수렴된다.

18세 소년 영옥(신우빈 분)은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다. 서울에서 전학 온 경태(박지빈 분)의 눈에 들어 처음으로 반장 완장을 차지만, 결국 교실 안 폭력의 방관자로 전락하고 만다. 한편 손자뻘 아들을 홀로 키워낸 어머니 정순(염혜란 분)은 서울에서 온 의사의 도움으로 까맣게 지워진 어린 시절의 파편들을 하나둘 맞추기 시작한다. 분홍색 선글라스를 끼고 제주 곳곳을 누빌수록, 78년 전 그날의 슬픈 약속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제주도의 광활한 자연과 풍광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다소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정지영 감독은 오히려 이를 의도적인 선택으로 승화시킨다. 제주의 풍경미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음으로써, 4.3사건 자체가 묻히지 않도록 한 것이다. 1998년과 1949년의 색감과 톤을 시대에 맞게 구분해낸 연출은 두 시간대의 정서적 온도 차를 섬세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경태의 어머니이자 정순의 정신과 의사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에게는 선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명백한 가해자의 연장선에 있는 이 인물에 대해 감독은 별도의 설명을 달지 않는다. 4.3의 피해를 준 이들이 어딘가에서 더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대비는, 관객 스스로 곱씹게 만드는 여백으로 남는다.
배우들의 앙상블도 탄탄하다. 염혜란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이어 다시 제주 어멍으로 돌아왔다. 기억을 잃었다가 조금씩 되찾으며 아파하는 정순의 감정선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그의 연기는, 이제 '제주 엄마'를 넘어 명실상부한 국민 엄마의 자리를 굳히기에 충분하다.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신우빈은 생경하지 않다.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친구를 향한 마음과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10대의 내면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영옥의 혼란과 성장을 자연스럽게 체화하며 염혜란과 진짜 모자(母子) 케미를 완성해냈다. 스크린 데뷔 전부터 주목할 만한 신인의 등장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화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이름들을 보게 된다. '내 이름은 제작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이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제작비 후원 등으로 마음을 보탠 이들의 이름이다.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용기 위에 세워진 작품인지를 그 목록이 조용히 증언한다.

매년 4월 3일, 고기 한 점조차 편히 먹지 못하며 그날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건을 스크린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이름은'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3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