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영화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구교환 이야기가 나온 적이 몇 번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구교환이 지니고 있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정형성, 관습의 테두리 밖으로 경쾌하게 빗겨가 있는 그만의 독자성, 메인스트림에 휘둘리지 않고 나아가는 흥미로운 행보로 귀결됐다. 한마디로 “넌 어디에서 온 종족이니?”의 느낌이랄까. 작년 ‘꿈의 제인’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배우상을 거머쥐며 화제에 오르내린 구교환은, 이미 독립영화계에서는 자신만의 전선을 견고하게 구축한 배우 겸 감독이다. 언제고, 그의 재능은 감출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꿈의 제인’에서 구교환은 클럽 ‘뉴월드’의 디바이자 가출 청소년들의 엄마, 그리고 마음에 품은 남자의 사랑을 끝내 얻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제인을 연기했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묘한 매력의 독보적인 캐릭터 탄생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 하는 제인의 태도는 기존 구교환이 만든 작품 속 인물들과 퍽이나 닮았다. 거북이를 배설하는 남자라는 설정의 단편 ‘거북이들’(2011)부터 미장센단편영화제 <희극지왕> 왕좌에 오른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2013) 등 구교환이 만든 작품에는 늘 희극과 비극이 공존했다. 슬픈 상황인데 보는 이로 하여금 웃게 만들고, 웃게는 하는데 또 뭔가 애잔하게 하면서 궁극에는 위로를 건네는 소질. 그런 그의 기질이 ‘꿈의 제인’의 제인을 보다 풍부하게 했으리라. 한마디로 제인은 구교환이다. 아니 구교환은 제인이다. 아니 그 모두다.
Q. 옴니버스 영화 ‘오늘영화’(2015) 인터뷰로 만난 게 2년 전이었죠. 당시 제 인터뷰 제목이 “당신은 구교환에 반하게…”
구교환: “…반하게 될 것이다!”
Q. 기억하시는군요. 예측대로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구교환: (웃으며 손사래친다.)
Q. 그때 ‘꿈의 제인’ 촬영준비로 다이어트 중이셨어요. 테이블에 놓인 쿠키를 먹을까 말까 고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구교환: 그러다가 결국 반 정도 먹었던 기억이…(웃음). 지금은 다이어트가 끝나고 체중도 거의 돌아왔어요.
Q. ‘꿈의 제인’의 제인은 섭식장애(거식증)까지 겪는 인물이더군요. 촬영 당시 식사량이 너무 적어서 스태프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후유증은 없으셨나요.
구교환: 마그네슘-비타민C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감량했기에 큰 후유증은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15Kg 감량!” 식의 기사 헤드라인이 나오더라고요. 체중에 포커스가 가는 게 쑥스러워요. 조금 멋쩍다고 할까요. 배우로서 당연한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지금은 기사를 거의 안 봐요. 처음에는 신기해서 찾아보고 인터뷰도 전력을 다 해 이것저것 이야기 했는데, 지금은 말 하나 하나에 책임감을 느껴야겠다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Q. 그때 ‘꿈의 제인’ 이야기도 살짝 했어요. 제인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굉장히 설레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제인이라는 캐릭터를 잘 전달해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깨고 싶다는 의지도 읽혔고요.
구교환: 야심이 좀 가득했던 것 같아요. 긍정적인 의미에서요.(웃음) 그 야심을 옮긴 거고요. 말씀처럼 제인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에 들떠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희 영화가 해피한 영화는 아니에요. 제인의 ‘불행론’(행복론으로도 보이는)’이 영화에 퍼져 있죠.
행복 전도사는 아니지만, 제인이 지니고 있는 그 태도가 저는 너무 좋았어요. 쉽게 위로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위로가 아닌가 싶었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그런 부분을 잘 옮겨야지 하는 설렘이 있었어요. 배우로서의 책임감도 있었고요.
Q. (트랜스젠더라고해서)목소리를 일부러 변조하는 식의 과장이 없어서 좋더군요. 그래서 더욱 제인 같아 보였어요. 이 영화로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하셨는데, 심사위원이었던 배우 김의성 씨는 “여우주연상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고요. 시나리오에 있던 제인이 구교환을 만나면서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 까란 생각이 있습니다.
구교환: 시나리오에 적혀 있는 인물은 실제 배우를 만나면 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를 만나 변한 게 있다면, 저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허허실실’이라고 해야 할까요?(웃음) 제가 유머를 좋아하는데, 조현훈 감독님도 유머를 좋아하세요. 그래서 감독님이 저를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감독님과 끊임없이 질문을 쌓아가면서 만든 작품이에요. 실제 촬영장에서 모든 분들이 저를 제인처럼 대해줬죠. 현장의 공기가 큰 도움이 됐어요.
Q. ‘남매의 집’(2009) ‘늑대소년’(2012)을 함께 한 조성희 감독도 그렇고 주변 많은 영화인들이 당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요. “어떤 행동을 하든지 어떤 말을 뱉든지 구교환이 하면 평범하지 않다”고 말이죠.
구교환: (쑥스러운 웃음) 뭐라고 답변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저에게서 출발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항상 제 모습이었던 것 같거든요. 다른 어떤 것들에게 따오지 않고 저에게서 출발한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늘 임했던 것 같습니다.
Q. 제인은 어땠나요? 탐나는 인물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배우가 지닌 욕망 중 하나가 ‘어려운 캐릭터를 돌파해 보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거든요.
구교환: 저는 인물을 만날 때 도전 과제처럼 생각하지 않아요. 버저 울리면서 ‘도전!’ 이렇게 다가간 적이 없습니다. 흥미롭고 궁금한 인물이면 다가가려고 한 것 같아요. 사실 제인이 어떤 사람인지 저도 잘 몰라요. 어쩌면 제 안에서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인터뷰니까요. 그런 생각은 들어요. 정리가 안 되고 뒤죽박죽이고 잘 모르니까 하는 것 같아요. 명확하게 ‘잡히는 인물’이면 오히려 호기심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아요.
Q. 제인이 일하는 이태원 클럽 ‘뉴월드’는 이상향 혹은 안식처 같은 면이 있는 공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구교환의 ‘뉴월드’는 뭔가요?
구교환: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르겠는데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영화는 아니었으면 좋겠고요. 제가 가수 우효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 그의 앨범 ‘민들레’가 나왔어요. 그 음악만 며칠째 반복해서 듣고 있죠. 그런 것들, 뭔가 집중하고 관심이 가고 제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지금 우효가 가사를 어떻게 썼는지 엄청 분석하고 있어요. 음악은 그렇잖아요. 3분을 위해 굉장히 응축해서 쏟아내잖아요.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면 즐거워요.
Q. 구교환이 우효를 바라보듯, 관객도 ‘구교환의 제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저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분석하고,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신경 썼을까’라고 말이죠.
구교환: 아…(웃음)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 저도 진짜 모르거든요. 그렇다고 동물적으로 연기하는 것도 아니에요. 굳이 레퍼런스라고 한다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 혹은 음악들을 조금씩 끼어 넣었던 것 같아요. 가령 유희열의 ‘뜨거운 안녕’을 들으면서도 제인을 떠올렸어요. 메소드로 동일시해서 연기한 건 아닌 거죠.
Q. 현장에서의 변수도 있겠죠?
구교환: 현장의 변수, 중요하죠. 영화에 나오는 바다도 촬영 날 처음 본 거예요. 하이힐을 신고 모레사장을 걷는데 그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영화에서처럼 힐을 신고 그렇게 달리게 된 거고요.(웃음) 그런 것 같아요. 가야지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저는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걸 좋아해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기술적으로 약속한 것 외에는 열어두는 편이죠.
Q. 제인이 말하죠. “난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쭉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구교환은 어때요?
구교환: 동의해요. 평소에 좋은데 가끔 불행이 온다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평소에 불행한데 가끔 행복이 찾아온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저는 후자에요. 어떻게 삶이 매 순간 하이라이트겠어요. 저는 제 인생을 시즌별로 나누고 있어요.(웃음) 지금은 하이라이트를 기다리고 있는 시즌이고요.
Q. 구교환의 하이라이트가 궁금합니다.
구교환: 아무래도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으니… (혼잣말)아, 이렇게 이야기 하면 너무 ‘영화, 영화’ 하면서 사는 것 같나… 몰랐는데, 제 삶의 엄청 큰 부분을 영화가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Q. 아…아닌가요?
구교환: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Q. 영화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구교환: 물론 저에게 영화는 매우 중요하죠. 그런데 영화만큼 중요한 것들이 더 많아요. 그리고 중요한 건 ‘저’인데, 제가 영화일 수는 없잖아요. 그럼 먹히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어른이 계신데 그 분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해 주셨어요. “교환아 인생을 예술과 교환하지 말고, 예술을 인생과 교환해야 한다.” 이 말씀이 되게 좋더라고요.
Q. 그런데 ‘구교환의 삶에 영화가 큰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좋은 의미’에서의 발언 같은데요.
구교환: 네. 그런데 그게 오늘 갑자기 부담스러워졌어요. ‘아닌데. 난 마냥 해피하지 않은데. 영화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죠. 아마 제 지금 상태가 그런 것 같아요. 이옥섭 감독과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오전에 2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받고 왔어요. 크랭크인이 올해인데 시나리오가 확 잡히지 않고 있거든요. 그런 컨디션을 숨길 수 없었던 거죠. ‘꿈의 제인’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참 행복한 부분인데, 오늘이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사람인지라.(웃음)
Q. 그럼요. 제인도 그러잖아요. “행복은?”
구교환: “행복은 15초”(웃음)
Q. 그런데 이런 생각, 이전부터 한 건가요? 아니면 최근에 부쩍 그런 건가요?
구교환: 저는 제가 아직도 초심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두렵고 실망하게 되는 일들이 더 많은 게 저는 좋아요. 얼마 전 춘사영화제에서 수상 소감을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어요.(구교환은 ‘우리 손자 베스트’로 춘사영화제 남우신인상을 수상했다) 소감으로 “계속 오해하고 열심히 할게요”라고 했죠. 오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더라고요. 연기든 연출이든 일단은 제 안에서 확고한 호오(好惡)가 강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중심이 안 잡히면 휩쓸리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오해는 하면 할수록 좋겠다 싶어요. 긍정적인 오해 말이에요.
Q. ‘꿈의 제인’은 구교환-이민지-이주영, 세 영화계 유망주들의 만남으로도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조현훈 감독이 “구교환 배우 덕분”에 캐스팅이 잘 됐다고 하더군요.
구교환: 앗! 이건 다른 의미의 ‘오해’인 것 같아요. 이것이야말로 진짜 오해입니다.(웃음) 제가 시기적으로 먼저 캐스팅 된 건 맞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 분이 합류해서 라인업이 강화된 거죠. 이민지 씨가 한다고 했을 때 “와~” 했어요. 이주영 씨 합류 소식에 또 한 번 쾌재를 불렀죠. 이민지 씨의 경우 이전부터 단편과 장편으로 많이 봤어요. 늘 생각하는 것 이상을 해 내는 배우라는 생각을 했죠. 주영 씨와는 이번에 붙는 신이 많이 없어요. 그래서 후에 완성본으로 확인했는데, 물개박수를 치면서 보게 되더라고요.
Q.배우로서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구교환:일단은 장편 연출작에 신경을 쏟을 것 같아요.(웃음)
Q. ‘남매의 집’ 이후에 충무로 러브콜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자주 뵐 수 없었어요.
구교환: 러브콜이라기보다는 문득문득 말씀을 주시는데, 그때 또 제가 문득문득 촬영을 하는 것과 겹쳐서 기회가 안 닿았어요. 제 작업이 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에겐 전력을 다해서 해야 하는 소중한 것들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 기회가 안 맞았던 것 같아요.
Q. 여러 작품을 함께 가는 경우도 많은데요.
구교환: 능력 밖이에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겐 없어요.
Q. 2년 전 그랬듯, 여전히 스스로가 ‘쎄뻑?’(‘행운’이라는 뜻의 은어)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구교환: 하하. 그게…바뀌었어요. 운으로 이야기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이건 운이에요” “이건 쎄뻑이에요”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건 제 작업에 대한, 그리고 제가 다가갔던 모습에 대한 책임감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제 운에 기대는 건 피해야 할 것 같아요.
Q. 오…
구교환: 저, 성장했나요?(웃음) 그런데 아직 안 컸어요. 아직 사춘기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