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칼럼니스트]
현재 극장가 흥행 순위 1, 2위를 달리는 ‘택시운전사’(장훈 감독, 쇼박스 배급)와 ‘군함도’(류승완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가 개봉되기 전 영화계엔 ‘쌍천만’이 운운되는 한편 대한해협 건너편에선 ‘군함도’를 폄훼하는 악질적인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만큼 두 작품에 대한 우리 국민과 주변국의 관심이 컸단 증거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나자 여론은 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군함도’에 대해선 재벌기업의 스크린 독과점과 역사왜곡이라는 악재가 작용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개봉된 ‘택시운전사’는 스크린 독과점의 논란 없이 좌석점유율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며 흥행 1위에 올라선 가운데 호평 일색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혹은 자식들을 데리고 한 번 더 보겠다는 관객들이 늘기까지 할 정도다.
이런 서로 다른 평가에 깔린 정서와 의식은 뭣일까? 그건 질곡과 왜곡으로 점철된 우리의 아픈 역사에 대한 현대인들의 지적인 고뇌와 더불어 제대로 바로잡아 후세에 올바로 알리려는 깨인 역사관에 근거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국민의식이 탄탄해졌음을 입증하는 현상이다.
‘택시운전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배경이다. 앞서 이를 소재로 한 ‘꽃잎’(1996) ‘박하사탕’(1999) ‘화려한 휴가’(2007)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 ‘26년’(2012) 등이 있었기에 신선한 소재는 아니다. 안방극장의 ‘장희빈’이나 ‘연산군’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운전사’가 흥행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가벼운 재미를 가능한 한 배제한 체 팩트로 픽션을 객관화한 데 있다.
택시운전기사 만섭(송강호)과 독일 기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는 실존인물이고 그들의 족적은 사실이지만 그 외 등장인물은 모두 가공이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당시의 언론과 여론의 왜곡이나 ‘통치권자’였던 전두환이 얼마 전 뜬금없는 자서전에 쓴 얼토당토않은 주장과 달리 가공의 인물들을 통해 실제 현장에서 발생했던 비극을 재현해내고자 한 노력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게 바로 역사가 주는 교훈이고, 진심을 담은 연출이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테크네다.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력이 엄청난 빛을 발했다. 감독의 연출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채고선 어깨에 힘을 빼고 진짜 광주의 시민 혹은 진압군이 돼 각자의 역할에 몰입했다.
그 선두엔 송강호가 있다. 트레일러에 등장하는 페이소스와 분노와 절망이 융합된 표정 하나만으로도 그의 진가는 빛난다. 더불어 “손님을 두고 왔어”라는 대사 하나는 모든 국민이, 특히 ‘어른’이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해야 사회가 정의롭고, 그래서 후세에게 행복한 세상을 물려준다는 가슴 뭉클한 교훈을 안겨줌으로써 관객의 입소문에 순풍을 불어준다.
만섭은 아내를 일찍 여의고 사글세방에서 초등학생 딸과 어렵게 산다. 밀린 집세 10만 원을 벌기 위해 광주의 현실도 모른 채 그곳을 취재하려고 잠입한 힌츠페터를 택시에 태우고 현지에 들어간다. 통금시간 전에 서울로 되돌아오겠다던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곳에 억류된 채 무간지옥 같은 현실을 통해 진실에 눈을 뜸으로써 천박한 개인주의와 무지한 정치적 시각에서 벗어나 ‘손님을 끝까지 태워야 하는’ 책임감을 이행하는 시퀀스는 ‘매트릭스’가 던지는 깊은 철학적 교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직설적이어서 쉽게 관객을 감동시킨다.
계엄령에 반대한 광주시민의 봉기를 ‘빨갱이들의 폭동’이라는 언론의 보도를 통해 인식한 객체계 혹은 물자체에 빠져있던 만섭이 힌츠페터와 함께 내려가 주관으로 목도한 ‘직관형식’은 현상계였다.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 안에서 천재해커로 살아가던 앤더슨이 모피어스 일행에 의해 지금까지 아키텍트가 설계한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왔음을 깨닫고 메시아, 즉 네오가 돼가는 과정이다.
그 내용은 무사히 독일로 돌아간 힌츠페터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만들어 광주의 실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역사적 기록이다. ‘만섭’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른 채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든 ‘경제성장’이라는 프로파간다 아래 횡행된 데마고기에 마취된 채 대통령 신격화의 광기에 젖어있던 전형적인 ‘꼰대’의 정신혁명을 픽션과 버무린 재현드라마에 다름없다.
이에 비해 ‘군함도’는 ‘텐트 폴’ 영화의 사이즈에 맞춰 감동을 위한 극적인 드라마와 재미를 위한 액션을 과하게 첨가하다보니 감독의 숭고한 본래의 의도가 많이 탈색됐다. 드라마 속에 친일부역자를 설정함으로써 실상을 제대로 알고, 더불어 현존한 그 잔존세력들을 경계하자는 감독의 의도를 단순히 ‘조선인 Vs 조선인의 갈등’이란 1차원적 시각으로만 해석해 친일이라 오역하는 극히 일부 세력이 있다는 건 분명히 오류다.
다만, 군함도 내에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술 담배 간식 등을 즐기고, 로맨스를 싹틔우며, 은밀한 집회를 통해 외부와 연락한 뒤 무기를 탈취해 집단 탈출한다는 시퀀스는 영화적 장치로는 문제없지만 역사적 사실에서 어긋난 게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강제징용자 문제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감독의 애국심이 왜곡되기까지 한 상황.
이는 역사를 다룰 때 아무리 영화라도 신중해야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교훈의 복습이다. 이준익 감독은 ‘박열’을 가능한 한 사실에 입각하려 했다고 연출의 변을 펼친 바 있다. 자칫 지루한 다큐멘터리에 그칠 법도 했는데 제작비 25억 원으로 무려 235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KBS2 드라마 ‘7일의 왕비’가 역사왜곡의 꼬리표를 매단 채 최근 종영된 사례가 좋은 비교 소재다.
고고학이 엄청난 돈을 들여 수천 년 전의 유물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그만큼 역사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인류의 삶에 지시등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의 진실여부를 재평가, 재해석하는 일만큼 잊힌 역사를 발굴해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역사는 종교 철학 과학 등 세상의 모든 학문 사상 이념 등과 직결돼있고, 그래서 현실과 떼려야 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안녕과 행복의 지침서다.
아예 시대만 빌린 퓨전사극이 아닐 바에야 역사를 중심축으로 삼는 영화가 얼마나 사실에 충실하거나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하는지 중요한 이유다. 어쨌든 ‘택시운전사’나 ‘군함도’는 격동기인지 과도기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에게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끔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고 현실을 올바로 보게끔 사유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선 역사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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