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칸(프랑스)=정시우 기자]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한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와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 그리고 백작에게 거래를 제안 받은 하녀와 아가씨의 후견인까지,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스토커’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한편 더 만들어 여성 3부작을 완성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바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서 시작된, 이 세상 딸들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관심이 ‘스토커’를 거처 ‘아가씨’에서 비로소 완성된 셈이다. 사랑의 딜레마에 빠진 딸들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을 들어봤다.
Q. 세 번째 칸국제영화제 방문이다. 칸에서 ‘아가씨’를 처음으로 공개한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박찬욱: 갈수록 영화 후반작업 시간이 길어지는 추세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아가씨’ 칸 버전을 보내고 나서도 계속 후반작업을 했다. 칸에 오기 전날 에도 밤샘 작업을 했는데, 중간에는 링거도 맞았다.(웃음) 그러다보니 여기 와 있는 게 ‘좋다/나쁘다’는 마음보다, 출국 전에 개봉판을 끝내놓고 와서 ‘다행이다’라는 안도의 마음이 크다.
Q. 국내개봉 버전과 칸버전엔 어떤 차이가 있나.
박찬욱: 편집은 똑같다. 다만 믹싱과 색감 등이 보강됐다. 그런데 그 차이를 잘 못 느낄 거다. 워낙 미세한 부분이라서.
Q.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세한 부분이 밟히는 법 아닌가.(웃음)
박찬욱: 맞다.(웃음) 어떻게 생각하면 한심한 일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다 그렇다. 약간의 차이에 목숨을 건다. 작은 하나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하나들이 모여서 큰 인상을 만들기도 하니까.
Q. 영화 공개 후, 반응이 다양하다. 호불호가 나뉘는 분위기인데, ‘박찬욱이 변했다’는 평이 특히 인상 깊었다.
박찬욱: 나는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계획을 세워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소재가 무엇인가에 따라 맞춰갈 뿐이다. ‘핑거스미스’라는 작품을 하기로 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형식이 뭔지, 태도가 뭔지를 가지고 고민하는 거다.
Q.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세 편의 작품 모두 원작이 있다. ‘올드보이’는 일본 만화를, ‘박쥐’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래캥’를, ‘아가씨’는 핑거 스미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아가씨의 경우 어떤 모티브에 반해서 재창조하고 싶었나.
박찬욱: 어떤 감독이라도 ‘핑거스미스’를 읽으면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너무 재미있으니까.(웃음) 반전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인물이나 풍속 묘사가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끌렸던 것은 하녀가 아가씨의 이빨을 갈아주는 대목이었다. 이를 갈 때 나는 아주 작은 소리,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숨소리와 향기. 그걸 영상으로 보면 어떨까 상상하니 꽃향기가 막 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대목을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Q. 할리우드에서 ‘스토커’를 연출한 경험이 이번 영화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박찬욱: 영향이 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촬영 횟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박쥐’의 경우 100회차 가까이 찍었다. 현장에서 송강호-촬영감독과 끊임없이 회의하고 편집을 하며 찍다보니 100회차가 됐다. 그런데 미국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촬영시간이 엄격해서 하루 12시간씩 딱 40회에 영화를 완성해야 했다. 그걸 경험하고 돌아와서 ‘아가씨’를 준비하는데, 한국도 표준근로계약이 생기면서 환경이 바뀌어 있더라. 촬영 횟수를 오버하면 막대한 촬영비가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12시간을 초과하지 말아야 했기에 시간을 잘 써야 했다. 촉박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촬영을 빨리 끝내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다분히 미국에서 받은 영향이다.(웃음)
Q. ‘스토커’는 시간과의 싸움이었겠다. 여유가 조금 더 있었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올 수도 있었겠다싶다.
박찬욱: 그랬을 거다. 배우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해가며 다양하게 찍어봤을 거다. 그런데 그게 더 좋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예술창작의 이상한 점이 바로 그거거든.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서 작품이 좋아지는 건 아니라는 것.
Q. 금기와 딜레마를 꾸준히 다루고 있다. 딜레마에 놓인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집중하고 있는데.
박찬욱: 모든 영화가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봤을 때, 딜레마 상황이야말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기 좋은 효과적인 장치라 생각한다. 그리고 동성애가 한국 대중문화가 잘 다루지 않는 일종의 금기라고 본다면, 그런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사회적인 의미의 금기를 잠시 무시하고, 사랑에 집중한 영화도 있을 수 있다고 봤다. ‘아가씨’는 ‘동성애의 대한 억압과 싸울 거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 ‘내가 속여야하는 사람인데 사랑하고 있어!’를 이야기 하는 영화다. 그게 이 드라마에서는 중요하다.
Q. ‘스토커’에 이어 여성의 성장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영화를 내놓았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는 것 같다.
박찬욱: 마침 칸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발자크의 소설을 읽었는데, 그런 문구가 있었다. “모든 위대한 사람에게서 여성적인 섬세함이 발견된다”라는 구절이. 내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 딸을 키워가면서 내 안의 여성적인 면모를 느끼게 되고 거기에 더 관심이 가지게 된다. 남자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여성성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Q. 다중시점과 3개의 파트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외신들이 ‘아가씨’를 ‘라쇼몽’과 비교하기도 하더라.
박찬욱: 재미있는 지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점이 다른 구성을 취하는 영화에 버릇처럼 갖다 붙이는 작품이 ‘라쇼몽’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가 수상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가, 어떻게 갈등을 해결하고 자신이 처한 조건을 극복해 나가는 투쟁의 과정을 그린 영화다.
Q. 에로티시즘에 대한 강렬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박찬욱: 성(性)은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중 하나다.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것이 영화 만드는 사람의 의무라면, 성은 피해가기 힘들만큼 중요한 문제다.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닌가 싶다.
Q. 지난 제작보고회 때 이런 인생을 살게 될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어떤 인생을 꿈꿨었나.
박찬욱: 어렸을 땐 고리타분한 인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인생이 이렇게 꼬였을까.(웃음) 아마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풀렸는지, 어리둥절한 기분을 못 벗어날 것 같다. 내가 원한 건 평화롭고 조용한 인생이었다. 여러 사람과의 협업이 필요한 영화는 나와 안 맞는 일이라 생각했고, 마침 원했던 영화과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혼자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 싶었는데 불가항력적으로 영화를 하게 됐다. 영화 일을 하면서 성격도 바뀌었고, 여러 사람들과의 협력도 즐기게 됐다. 왜냐하면 경력이 쌓일수록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생기니까. 그들과의 협업은 나의 한계를 확장시켜 주는 즐거운 일이 됐다. 감사한 일이다.
Q. 영화의 어떤 과정이 즐겁나.
박찬욱: 영화를 만들기 위한 전 작업이 즐겁다. 다만 홍보와 인터뷰는 참 힘들다. 레드카펫 행사도 그렇고. 영화가 개봉 즈음에 교통사고가 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일동 탄식). 입원을 하면 인터뷰를 안 해도 용서 해 줄 테니까.
Q. 이 영화를 통해 전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찬욱: 감정에 충실하면,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감정이라면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Q.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고 있나.
박찬욱: 하하하. 나는 나약한 소시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