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사(NASA)의 꼼꼼한 감수 속에서 탄생한 영화 ‘마션’을 보면서 ‘지상 최대의 판타지극’이라 여겼던 것은 단순히 주인공 마크 와트너(맷 데이먼)가 보여준 기상천외한 긍정성 때문도, 그가 우주 공간에서 펼친 가공할만한 과학기술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화성에 조난당한 시민 한 명을 무사 귀환시키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과 인력을 아까지 않고 돌진하는 미국정부의 박력과 그런 정부와 함께 687일 동안 와트너를 응원한 국민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만연된 관료주의와 구태의연한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정신적 내상을 경험해 온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마션’ 속 모습이 ‘과연 가당키나 하나’하는 부러움과 놀라움이 뒤섞였던 게 사실. 문득 생각해본다. 마크 와트너가 한국인이었다면, 혹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이었다면. ‘터널’은 슬픈 예감에 응답하는 영화다.
이 남자, 이정수(하정우). 딸의 생일 케이크를 차에 싣고 달리다가 마른하늘에 봉변을 당한 자동차 세일즈맨 이정수가 갇힌 곳은 지구에서 7700만km(평균) 떨어진 화성이 아니다. 전화 한 통으로 제설작업에 필요한 장비를 반나절 안에 거뜬히 조달 받을 수 있는, 그러니까 접근성이 나쁘지 않은 대한민국 어딘가에 위치한 터널이다. (상대적이긴 하나) 이 남자를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필요한 건 구조작업의 전문성과 꼼꼼한 구조 매뉴얼, 그리고 구조에 대한 의지와 국민들의 식지 않은 응원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너진 터널 앞에서 대한민국은 이렇다 할 매뉴얼이 없어 우왕좌왕한다. 미디어는 특종에 안달한다. 현장을 방문한 관료들은 무너진 터널이 병풍인 냥 기념사진 남기기에 바쁘다. 대한민국의 슬픈 민낯은, 터널 공사 자체가 총체적 부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무수히 많은 과거의 슬픔을 환기시킨다.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 ‘터널’에서 진짜 숨이 막히는 건, 붕괴된 터널 속 어둠이 아니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시대의 공기일 것이다.

‘터널’은 한국형 재난 영화들이 오락적 재미 혹은 관습에 의해 쉽게 타협해 온 지점들을 마음으로 수리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특기하다. 김성훈 감독이 건설한 이 영화는 앙상한 아이디어와 눈물 짜는 신파로 찍어낸 여타 재난영화보다 튼튼한 골격을 갖추고 있다. 재난영화 특유의 클리셰와 일찍이 거리를 둔 ‘터널’에는 감정 과잉이 없고, 영웅이 없고, 일방적인 악인이 없다. 보편의 감정이 있고,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보통 사람이 있고, 시스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방만해진 사람이 있을 뿐이다. ‘터널’의 풍광이 시각을 넘어서 통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영화가 포착해 낸 삶의 단면들 때문일 것이다. 전작 ‘끝까지 간다’에서 순도 100% 짜릿한 장르영화를 구현하며 개성을 드러낸 김성훈 감독은, ‘터널’에서 다시 한 번 그만의 인장을 새겨 넣는다.
그렇다고 ‘터널’이 상영 내내 허무주의를 안기는 영화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슬픔 한 가운데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이다. 갇힌 공간에서 만들어가는 에피소드의 아이디어가 좋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서스펜스도 쫀쫀하다. 무엇보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놓지 않으려 한다. ‘터널’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태도가 작품 전반에서 감지되는 속 깊은 영화이기도 하다.
1인극이 요구되는 ‘터널’은 배우입장에서는 깔아진 멍석과도 같은 작품이다. 멍석을 깔아주면, 그 부담감에 단점을 드러내는 유형의 배우들과 달리 하정우는 도리어 이를 자신의 에너지로 치환하며 간파해나가는 스타일 같다. 원맨쇼에 가까운 1인 코미디 장면부터, 감정을 저글링하듯 켜켜이 쌓아뒀다가 발산하는 극한의 상황까지. 영화라는 4각 프레임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배우인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리니까 하정우는 ‘터널’이라는 영화를 숨 쉬게 하는 근사한 통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