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김지운 감독은 장르의 탐험가다. 그의 작품은 머무르는 법이 없다. 코미디, 공포, 느와르, 서부극, 탐정물…. 김지운은 프로젝트마다 늘 새로운 수를 둔다. 그러고 보면 놀라운 일이다. 매번 장르를 널뛰기 하는데도 불구하고, 매작품마다 김지운이 보인다. 김지운의 소유격이라 부를만한 기묘한 뉘앙스. 언제고 그는 그것을 ‘덧없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덧없음’이라는 기표가 ‘김지운만의 색깔’을 가늠하는 셈이다. 그래서였다. 그가 ‘밀정’을 만든다고 했을 때, ‘김지운의 색깔’이 어떤 식으로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의 시대에 투영될지 궁금했던 건. 김지운의 말마따나 ‘밀정’은 차갑게 시작해서 뜨겁게 끝나는 영화다. 누군가는 ‘밀정’을 두고 김지운의 이전 작품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이번 영화에는 김지운의 인장들은 곳곳에 박혀 있다. 여전히 그의 인물들은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엇나가는 시선이, 쓸쓸한 뒷모습이, 풍부한 조명이, 미세한 정적이 이야기의 하나로 기능해 ‘밀정’만의 무드를 만들어낸다. 대동소이하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 속에서 작품의 ‘독창적인 결’을 결정짓는 건, 결국 감독이라는 사실을 ‘밀정’을 보며 내내 했다.
Q. 베니스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토론토→시체스→런던아시아영화제→미국판타스틱페스트 등에 잇따라 초청됐다.
김지운: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유럽 시네필들이 진짜 많다. 할리우드에도 한국영화를 보는 분들이 많고.
Q. 지난 8월, ‘스타트렉 비욘드’ 홍보차 내한한 사이먼 페그가 ‘장화, 홍련’(03)을 재미있게 봤다고 한 게 생각난다.
김지운: 그랬나? 하하. 그건, 몰랐다. 내 영화가 외국에서 특이한 게, 두 패로 나뉘는 느낌이 있다. ‘반칙왕’(00)패와 ‘달콤한 인생’(05) 패로.(웃음) 그 밑에 ‘악마를 보았다’(10)를 좋아하는 소수 열광적인 마니아 팬들이 있다.
Q. ‘악마를 보았다’에 열광하는 해외 팬이 많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와 반응이 유독 다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김지운: 엄청 다르다. 한국에서는 ‘악마를 보았다’를 싫어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지 않나.(웃음) 물론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외국에선 많이들 좋아해주신다. 영화 감상의 차이 같은데, 우리는 영화를 조금 현실적으로 보는 면이 있다. 그에 반해 그들은 영화를 순수하게 장르적으로 보려는 게 있다. ‘악마를 보았다’의 경우 익스트림장르인데다가, 표현기법이나 주제가 마니아틱한 영화여서 좋아하는 분들은 너무 좋아한다.
Q. 어딘가에 내 영화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팬이 있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김지운: 그렇지. 열심히 만들었는데, ‘무플!’ 이런 거 너무 슬프잖아.(웃음) 너무 위악적인 느낌만 아니라면 호평도, 혹평도 좋다. 만든 입장에서 반응이 일어난다는 건 좋다고 본다.
Q. 평들을 찾아보는 편인가 보다. ‘밀정’의 경우 인상적인 평이 있었나.
김지운: ‘빼 놓을 배우 하나 없다’라는 평이 일단 좋았다. ‘전반부는 김지운스럽고. 후반부는 김지운스럽지 않은데 둘 다 흥미롭다’는 평도 흥미롭게 봤다. 그렇게 비춰질 수 있겠다 싶더라. 음악 선곡은 조금 모험이었는데, 선곡이 인상적이었다는 것도 좋았다.
Q. 음악선곡은 정말이지! 의열단이 일본군에 잡혀가는 장면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re Smiling’이 흐른다. 처참한 상황과 대치되는 낭만적인 음악이다.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Bolero’ 역시 그렇고.
김지운: 영화의 무드나 톤 앤 매너, 리듬감 등의 회로도를 만들기 위해 이미지를 많이 채집하는 편이다. 음악도 많이 듣는다. ‘이런 분위기의 영화였으면 좋겠다’ 싶은 음악들을 수집하는데, ‘밀정’에 쓰인 세 곡 모두 초기 플레이 리스트에 선곡한 곡들이다.
Q. 음악 선곡이 모험이었다는 말은, 호불호가 나뉠 거라고 예상했다는 의미인가.
김지운: 개인적으로는 분위기와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으로 넣었다. 그런데 현장편집 때 머뭇거리는 스태프들이 있더라. 너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때 ‘음악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호불호가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다.
Q. 어쨌든 음악이 더해져서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김지운: 누군가가 그러더라. ‘암살’이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면, ‘밀정’은 60년대 유럽느와르 같다고.
Q. ‘밀정’의 이미지로 채집한 건 어떤 건가.
김지운: 벽돌담, 거기에 서 있는 두 남자, 뒷모습… ‘달콤한 인생’ 때와 비슷한데, ‘밀정’은 그 속내를 더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 뒷모습 이미지를 많이 채집했다. 실제 영화에도 뒷모습들이 많이 나온다. 인물들이 카메라에 등장할 때 뒷모습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 조각들 하나하나가 결국 영화 전체 분위기나 주제와 다 연결이 된다.
Q. 말한 대로 당신 영화에서는 이미지-조명-침묵이나 시선 등이 이야기의 하나로 기능해 오곤 했다.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이 대표적이었다.
김지운: 맞다. 그게 내 작업 스타일이다. 이번엔 특히나 더 배우들에게 ‘스몰 액팅’을 요구했다. ‘우리 안에 밀정이 있다’는 전제에서 풀어나가는 영화이기에 아주 작은 디테일들이 굉장히 중요했다. 미묘한 시선처리라든가, 시선이 마주치고 빗나가는 순간, 작은 기침 하나, 호흡하나…그 미세한 파열음이 주는 파장이 중요했기에,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카메라를 굳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편집할 때는 모니터 화면이 작다보니, 불안감 때문에 카메라가 깊게 들어가는 쪽으로 디렉팅 했는데,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자신이 생겼다. ‘아 카메라를 더 빼고, 풍경과 함께 시선을 처리해도 다 설명이 되겠구나’를 깨달은 거다. 다음 영화부터 그 안배를 조금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Q. ‘스몰 액팅’은 정확히 어떤 식의 요구인 건다.
김지운: 가령 공유에게는 “호흡 빼지 마” “호흡을 더 길게” “들숨으로” 식으로 연기를 디테일하게 주문했다. 공유가 강의 받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웃음)
Q. ‘부산행’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촬영이 빨리 진행돼서 놀랐다고 하던데, 비슷한 시기에 촬영된 ‘밀정’에서는 극과극의 체험을 했겠다.(웃음)
김지운: 그랬을 거다.(웃음) ‘부산행’에서 편하게 연기하다가, 여기서는 작은 호흡 하나도 조율해야 했으니까. 자기는 그런 디렉팅을 태어나서 처음 받아봤다고 했다. 마치 박진영의 ‘소리 반 공기 반’ 같다고.(일동 웃음)
Q. ‘전반부는 김지운스럽고, 후반부는 김지운스럽지 않다’는 평가가 흥미롭게 들리는데, 만들 때 스스로 인지한 부분인가.
김지운: 어느 정도 했던 것 같다. 초반에는 콜드느와르 기조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의열단 생존 문제로 들어가면서 스스로에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라면 저 고문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라면 편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누군가에게는 밀정을 강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빼앗긴 나라는 되찾는 사명감을 부여한, 갈기갈기 찢겨진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이 사람들의 위험이라는 것은 범이 상상할 수 없는 압도적인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영화가 자연스럽게 뜨거워졌다. 동시에 내 기존 영화들에 비해 인물 감정에 포커싱이 많이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 ‘컷팅’이 빠르다고 하는 분들이 많다. 음악 역시 비장한 장면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스윙재즈가 나오니까 감정이 차단당한 느낌이 든다는 의견도 많다.
Q. 감정이 더 깊게 나가거나, 비극적인 장면에서 슬픈 음악이 흘렀다면, 영화가 조금 지지부진해 보이지 않았을까. 감정을 적당한 선에서 커트한 것이 ‘밀정’만의 무드이지 않을까 싶다.
김지운: 나 역시 그런 의도였다. 뭐라 그럴까. 감정이 찌릿찌릿-간질간질 하다고 하나? 그런 건, 좀.(웃음) 왜 속된 말로, ‘영화는 울고 관객들은 안 운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나는 반대로 ‘영화는 덜 울고, 관객들에게 감정을 토스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흥미롭게도 최근 일제강점기를 다룬 동년배 감독들의 작품들, ‘암살’ ‘아가씨’ ‘동주’ ‘덕혜옹주’가 다 다르게 나왔다. 상당히 좋은 것 같다. 영화의 우열이 아니라, 차이에서 오는 다른 재미를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다. 똑같으면 재미가 없지 않나.
Q. 이정출(송강호)과 김우진(공유)이 사진관에서 처음 만나 서로의 본심을 감추고 대화하는 장면은 배우들에게도 연출하는 입장에서도 신경이 꽤 쓰였을 것 같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 부분에서 설득력을 갖춰야 이후 내러티브에 힘이 생기니까.
김지운: 거의 초반에 찍은 장면이다. 두 인물이 뭔가 ‘쇼잉’을 하는데,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야 하는 씬이었다. 거기에서 공유가 선방했는데, 송강호가 정말이지… “나, 경무국 이정출이요”할 때를 봐라. 잔뜩 긴장이 곤두서 있는 상황에서 호흡을 확 풀어서 이야기 하니까 깜짝 놀랐다. 대사를 더 긴장감 있거나 세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볍게 ‘툭’. 속으로 ‘우와, 내 영화에서 이런 연기를 보는 구나’ 감탄했다. 옛날에 샘 페킨파 감독의 ‘철십자 훈장’(77)이라는 영화에서 제임스 코번이 호흡을 끊어서 연기하는 걸 굉장히 감명 받으며 본 기억이 있다. ‘언제고 저런 고급스러운 연기를 배우에게 주문해야지’ 했었는데, 송강호가 앞서 그걸 해 준거다.
Q. 이정출의 실제 모델인 황옥은 역사적으로 아직 정확하게 판단되어지지 않는 인물인데, 영화가 취하는 자세는 황옥이 의열단을 도왔다 쪽에 가깝다.
김지운: 그가 의열단을 도왔다/안 도왔다보다는, 사람들을 혼란과 모순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시스템과 공기를 담아보고 싶었다. 누군가는 밀정으로, 누군가는 독립운동가로, 무언가의 진영에 속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압박을 말이다. 그랬을 때 이정출이라는 인물은 아이러니한 시대상을 가장 잘 압축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김우진의 실존 인물인 김시현의 경우, 항일 투쟁에 대한 기록은 분명한데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그러한 공이 인정 못 받는 게 있다. 김시현 외에도 엄청난 항일운동을 했음에도, 월북이나 정치적 이유 등으로 외면당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Q.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담은 소설 ‘아리랑’ 이야기를 오래 전 인터뷰에서 한 적이 있다. 김산 역시 황옥처럼 여러 정치적 이유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김지운: ‘아리랑’은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전보다 스케일이 작아진 게 아닌가, 라는 생각. 왜 대륙적 기질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기질이 중국 사람들에게 종종 발견되는데, 누군가를 인정하면 다 열어주는 호방함이 그들에겐 있거든. 우리도 만약 위가 터져 있는 나라로 계속 있었다면,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크고 넓고 너그럽고 호방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아리랑’을 읽으면서 한 거다. 동시에 ‘만주 벌판을 달리는 선열들의 호방한 모습을 스크린에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활극으로 푼 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 08)이다. 목숨을 다루는 촌각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아주 내밀하고 숨 막히는 서스펜스는 ‘밀정’으로 풀린 것 같고. 그러고 보니 정말 김산의 ‘아리랑’이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뉜 것 같다.
Q. 흥미롭게도 이전에 ‘아리랑’이 영화로 추진된바 있는데, 그때 김산 역에 송강호가 캐스팅 됐었다. 결국 영화가 무산됐지만.
김지운: (놀라며)아아아~ 그랬다! 명필름에서 준비했었지.
Q. 맞다. ‘아리랑’에 얽힌 감독과 배우가 결국 ‘밀정’에서 만난 셈이다.
김지운: (놀라며 혼잣말) 오~ 송강호와는 그런 게 진짜 있는 것 같아. 어떤 기운이.(웃음)
Q. 김지운 영화에서 공간은 빼 놓을 수 없는 요소다. ‘밀정’에서는 경성-기차-상하이, 크게 세 공간이 주요하게 쓰였다.
김지운: 세계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던 당시 상해는 동양/서양, 전근대/근대가 뒤섞인 곳이었다. 거기에서 오는 이국적인 풍경이 있는데, 내가 가져가려는 톤 앤 매너를 딱 잡아줄 수 있는 공간이다 싶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른 묵직한 공기가 감지되는 상해에서 본격적인 스파이물의 무드가 나왔으면 했다. 경성과 상해를 잇는 브릿지인 기차는 폭탄을 싣고 달리는 운동수단이기도 하지만, 시대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Q. 은유로서의 기차!
김지운: 맞다. 자기 신념이 확고한 한 사람(김우진)은 머뭇거림 없이 스트레이트 하게 한 방향으로 깨끗하게 쭉쭉 뻗어간다. 반면 또 한 사람(이정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갈팡질팡 한다. 이들을 몰아붙이는 기차를 ‘어떤 시간성, 세월을 대변하는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
Q. 기차 씬은 ‘놈놈놈’에서도 담아 낸 바 있다.
김지운: ‘좁고 폐쇄된 공간에서 김지운의 장기가 잘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더라. 내가 공간을 굉장히 밀도 있게, 그리고 조각조각 다 쓰는 편이니까.
Q. 그래서 일거다. ‘조용한 가족’의 산장, ‘반칙왕’의 링, ‘달콤한 인생’의 스카이라운지, ‘놈놈놈’의 만주 벌판 등, 당신 영화의 공간들이 모두 긴 인상을 남긴 이유는.
김지운: ‘장화, 홍련’ 때 류성희 미술감독이 “감독님 너무 좋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유를 물어보니까 “구석구석을 다 쓰니까, 만드는 보람이 있다”고 하더라.(웃음) 그때 알았다. 내가 공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정도로, 그 안에 뭔가 들끓는 이야기를 집어놓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김지운 특유의 미장센이라는 말도 나온 게 아닌가 싶다.
Q. 실생활에서도 공간을 중요시하나.
김지운: 중요하다. 환경과 공간은. 산이나 바다 같은 자연과의 근접성이 좋은 곳을 선호한다.
Q. 의외다. 뭔가 카페가 있는 도시적인 분위기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웃음)
김지운: 카페도 좋아한다. 그러니까, 강 옆에 카페가 있으면 금상첨화지.(웃음)
Q. 사니리오 쓸 때는?
김지운: 시나리오는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쓴다. 집에서도 쓰고, 사무실에서도 쓰고, 카페에서도 쓰고, 심지어 차 안에서도 쓴다. 아주 조용한 곳은 피하는 편이다. 반작용 같은 건데, 살짝 나를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집중이 더 잘 되는 편이다. ‘화이트 노이즈’(적당한 소음)라고 하나? 그 상태가 나에겐 최적이다. 아무 소리가 안 들리면 괜히 궁금해, 밖이.(웃음)
Q. 이정출과 정채산(이병헌)이 만나서 술을 나누는 신은 ‘놈놈놈’ 이후 7년 만에 재회한 배우들도 그랬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감독 입장에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 같다.
김지운: 뿌듯했다. 흐뭇하고. 진짜 고수들 아닌가. 내가 바둑은 못 두지만 어떤 돌을 ‘탁’ 뒀을 때 감탄하게 되는 것들이 있지 않나. 그게 왜 ‘묘수’이고, ‘신의 한 수’ 인지를 알고 두는 것들. 호흡이며 시선이며 대사 처리며 텐션을 주고받는 것이며, 두 고수의 수놓는 걸 보면서 신났다.
Q. 많이들 그러더라. 김지운의 페르소나는 송강호인가, 이병헌인가.
김지운: 하하하. 고민을, 좀. 그러고 보면 ‘놈놈놈’이 참 여러 다양한 기류를 가져다 쓴 작품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Q. 엄태구는 어땠나. 그의 뜨거운 에너지도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였는데.
김지운: 왜, 배우 같은 사람이 있지 않나. 연예인 같은 사람이 아닌. 엄태구를 봤을 때, 딱 배우 같았다. 엄태구는 오로지 연기만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연기를 생각하지.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연기에 의해서 생기는 다른 환경을 꿈꾸는 게 보인다. ‘이걸 잘해서, 뭔가 다른 걸 얻어야지’ 하는, 허영들. 다른 기대감들. 그런데 엄태구는 다른 거에 정신 팔려 있지 않은 사람, 오로지 연기만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신뢰가 오디션 볼 때부터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후배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더라. 실제로 엄청난 몰입도와 집중력을 갖고 있는 배우였다.
Q. 할리우드 영화 ‘카워드’가 늦춰지면서 ‘밀정’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 ‘카워드’는 어떻게 되는 건가.
김지운: 그건 이제 물 건너갔다. 서로 안 하기로 했다.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다음 작품은 ‘인랑’이 될 것 같다.
Q. 미국 프로젝트는 꾸준히 준비할 텐데.
김지운: 내가 놀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에이전트가 계속 시나리오를 보내고 있기는 하다.(웃음) 매니지먼트가 있고 에이전시가 있는데, 매니지먼트 회사가 출판 베이스라서 원작들이 굉장히 많다. 스릴러 쪽으로 찾아보는 중이다.
Q. 할리우드에서의 경험이 당신에게 가져다 준 변화가 있나.
김지운: 현장에서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송강호 씨가 그러더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영화를 찍고 있다고. 내가 늘 회차를 오버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번에는 날씨로 인한 것 빼고는 없었다. 미국은 시간 개념이 엄격하다. 이것저것 시도해 볼 여유가 없기 때문에, 필요한 걸 정확하게 요구해서 먼저 찍어야 한다는 압박이 컸다. 그게 어느새 체화가 된 것 같다.
Q. ‘놈놈놈’은 ‘칸버전-국내버전-토론토버전’ 등 다양한 결말들이 있었다. 그만큼 많은 촬영 분량과 시도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지운: 그때는 모든 스태프들에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해보자’라는 게 있었다. 서부극을 만드는 것에 대한 로망이 특히나 있었고. 이번은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할리우드를 다녀온 게 나에게는 다른 방향으로의 모색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밀정’ 이후의 영화는 나 역시 궁금하다. 뭔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다. 좋은 것은 가지고 가되, 내가 못했던 것은 바로잡아 갈 수 있을 것 같다.
Q. 못했던 것은, 구체적으로 뭔가.
김지운: 이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서사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구겨 넣으려 하는 게 있었다. 그로인해 나의 고유색은 분명해졌지만, 영화 자체로는 약간 틀어진 느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젠 영화가 요구하는 것과 내가 요구하는 것을 매치시키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것들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 과정에 ‘밀정’이 자리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