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수다쟁이에 사교성 좋고 유쾌한, 친구 같은 남자. 김남길은 기자로 하여금 인터뷰어(interviewer)로서의 본분을 잃게 만드는데 아주 탁월한 재능을 지닌 배우다. 워낙 달변인데다가 머무는 공간의 분위기를 유들유들하게 매만지는 배우인지라 대화를 하다보면 ‘에라 모르겠다, 인터뷰가 무어라. 키득거리며 사담이나 나누고 싶다’는 유혹을 강하게 일으킨다. 물론 그것이 그의 전부라 생각한다면 김남길이 지닌 모습 중에 반은 파악하지 못한 것일 게다. 실제로 유머로 감싸여진 그의 말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 안에 옹골차게 들어앉아 있는 확고한 자기 주관과 소신에 놀라게 될 때가 많은데, 이번 ‘판도라’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뷰 녹취록을 풀다가 뒤늦게 ‘아, 이 배우가!’라고 탄복하게 되는 지점이 여러 번 있었다. ‘유머와 소신’의 유쾌한 동거. 그것은 아마도 김남길이라는 배우를 추동하는 큰 자산일 것이다. 배우 뿐 아니라, NGO ‘길스토리’ 대표로서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걷고 있는 김남길의 스텝이 흥미롭다.
Q. 컨디션, 괜찮나요? 어제 VIP 시사회 끝나고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들었습니다.(웃음)
김남길: ‘무뢰한’을 함께 한 전도연 선배랑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님이 오셨어요. 두 분에게 붙잡혀 있었죠.(웃음)
Q. 아침까지요?
김남길: 중간에 도망을…(웃음)
Q.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평을 들었나요?
김남길: 도연 선배가 영화를 잘 봐 주셨어요. 의외로! 선배가 평가를 좀 냉정하게 하시는 편이거든요. 우리 영화엔 신파도 있고 해서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좋게 이야기 해주셔서 ‘뭐지? 진심인가?’ 했죠. 한재덕 대표님도 “엔딩은 반칙 아니냐. 울지 않으려고 버텼다”고 해 주셨어요. 친한 분들이 응원해 주시니까 기분이 좋았죠.
Q. 수척해 보이는 건, 수면 부족은 아닌 것 같고. ‘판도라’ 때와 비교하면 살이 많이 빠져 보이네요.
김남길: ‘판도라’ 촬영 때는 살을 일부러 찌웠어요. 수더분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세수도 안 하고 연기하곤 했죠. 캐릭터와 스토리 흐름상 메이크업이 필요 없는 현장이기도 했어요. 아, 오늘은 씻고 왔어요. 새벽에 머리까지 감고 잤습니다.(일동웃음)
Q. 기존과 달리 ‘판도라’에서 편해 보이는 느낌이 강하긴 했어요. 굳이 당신 필모그래피에서 찾자면 ‘해적’과 유사하죠.
김남길: 그동안 주로 도시적인 이미지를 연기했어요. 슬픈 트라우마를 지닌 이미지를요. 어릴 때 ‘배우에겐 이름을 들었을 때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양조위-장첸을 롤모델로 삼았죠.
Q. 퇴폐적인?
김남길: 그렇죠. 퇴폐적인.(웃음) 그런데 위험성이 있더라고요. 너무 그쪽으로 각인 되다보니 연기 폭을 넓히는데 어려움이 따랐어요. 실제로 관객들이 ‘해적’에서의 달라진 제 모습에 적잖이 놀라시더라고요. ‘판도라’에서는 사투리를 하는데다가 철부지 청년이라, 더 큰 괴리감을 느끼시지 않을까 걱정을 했죠.
Q. 사투리 연기는 일종의 도전이었겠네요.
김남길: 네. 사투리 선생님과 한 달 정도 연습했어요. 지방에 가서 직접 부딪혀 봐야 사투리 실력이 빨리 향상된다고 해서 하루는 부산에 내려갔어요. 택시를 타고 경상도 말로 자신 있게 “아재요! 해운대 좀 가입시더~” 했는데, 택시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를 쓰윽 보시더니 “헤헤. 서울에서 오셨는가 보지예?” 그러는 거예요.
Q. 하하. 고수 앞에서 주름을 잡은 셈이됐군요.
김남길: 그러니까요. 그때 딱 포기!(웃음) 경상도 출신이 아니고서야, 그 지역 사투리를 완벽하게 하겠다는 게 욕심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정서적 전달에 더 집중하자고 목표를 수정했죠.
Q. 재혁은 재난영화 주인공 중에서 상당히 평범한 축에 속해보입니다.
김남길: 이 시나리오에서 좋았던 게, 그 부분이에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 주인공들이 ‘쿨’하잖아요. 죽으러 가는 순간까지도 말이죠. 재혁은 다르죠. 영웅이 되려고 한 인물이 아니에요. 가족을 지키려다보니, 의도치 않게 임무에 투입된 쪽에 가깝죠. 영화가 지루할 수 있기에 유머를 좀 넣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감독님이 극구 반대했어요. ‘쿨한 척 하지 말라’고. ‘그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현실감과 리얼리즘을 중요시 하셨죠.
Q. 할리우드 영웅과 차별화 된 건 좋은데, 그게 또 너무 지극히 한국적인 히어로라는 면에서는 아쉬워요.
김남길: 그럴 수 있겠네요. 한국식 재난블록버스터인지라…(웃음) 감독님께서 한국적인 정서를 많이 녹이려고 하셨어요. 보는 사람에 따라 아쉬움은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나름 만족해요.
Q. ‘부산행’ 팀과 촬영 기간, 세트장이 같았던 걸로 알아요. 식사장소도요.
김남길: 네. 같이 썼어요. ‘부산행’ 팀뿐 아니라 ‘검사외전’ 팀도 있어서 배우들끼리 오가며 인사하곤 했어요. ‘부산행’ 촬영장에 가서 공유도 만나곤 했는데 “같은 재난 영화들끼리 파이팅!” 이랬죠.
Q. 좀비 분장한 배우들과 방진복으로 무장한 배우들이 한 공간에서 식사하는 모습은…상상만 해도 흥미롭군요.
김남길: 우리도 힘들었지만 좀비 역할 하신 분들도 엄청났을 겁니다. 몸동작이 많으니까요.
Q. ‘판도라’ 팀은 방진복 때문에 화장실 가는 게…(웃음)
김남길: 아유. 힘들었죠. 옷을 혼자 못 벗으니까 화장실을 단체로 가야 했어요. 다 같이 옷을 벗고 쫄쫄이만 입은 채 화장실로 달려갔죠. 마치 ‘졸라맨’처럼요.(일동웃음) 저는 촬영할 때 현장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편인데 이번에는 의상 때문에 많이 못 움직였어요. 그리고 방진복을 입으면 폐쇄공포증이 조금 와요. 공기가 통하지 않을 것 같고 폭발하는 게 아닌가라는 불안감도 오죠. 발을 동동 구르면서 힘들어 하면 스태프들이 달려와서 벗겨주곤 했어요. 체력소모가 컸는데 선배님들이 특히 힘드셨을 거예요. 와, 산소통 무게가… 겉보기에만 산소통처럼 만들어도 됐을 것을, 감독님이 그 놈의 사실주의에 꽂히셔서.(일동웃음)
Q. 촬영을 끝내고 개봉을 기다리는 동안 경주에서 실제로 지진이 발생했죠.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김남길: 촬영 당시에는 우리가 지진 안전지대라고 생각했어요. 지진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진짜 이 정도 강도에 이만큼 흔들린대?” “이 정도에 건물이 붕괴될 수 있대?” 리얼리티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촬영을 했죠. 그런데 개봉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지진이 현실이 됐죠.
Q.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죠, 이젠.
김남길: 지진 느끼셨어요? 서울에 있는 저도 지진을 감지했으니 경주나 대구에 계신 분들은 어땠겠어요. 그날 이후 ‘쿵’ 소리만 나도 자다 벌떡 일어날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상황이 그러다보니 개봉 시기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어요. 우리 영화가 지진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거나 이를 이용해 장사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을까, 우리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곡해되지 않을까, 감독님이 특히나 걱정을 하셨어요. 그런데 자연재해는 진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인재는 고칠 수 있…하긴, 요즘 보면 그것도…
Q. 불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을…(웃음) 영화가 개봉시기에 극사실주의가 돼 버린 느낌이 있습니다.
김남길: 네. 시국과도 너무…
Q. 놀랍죠.
김남길: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촬영 때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있어요. 김명민(대통령 역) 선배님이 “이런 사태를 대비한 재난 시스템이 있을 거 아닙니까!” 하니까 주진모 선배님(행자부장관 역)이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러잖아요?
Q. 그때 극장 안에 있던 분들이 대부분 ‘빵’ 터지던데요?
김남길: 저희도 촬영 때 웃었던 장면이에요. “에이~ 좀 그렇다”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피부로 와 닿는 이야기가 돼 버린 거죠.
Q. 두 달 전에 ‘판도라’를 봤다면 ‘비약 너무 심해!’ 했을 부분도 지금 보면서는 ‘그럴 수 있지’ 싶은 게 꽤 있었어요. 비선총리도 그렇고.
김남길: 그래도 영화에서는 대면보고라도 하잖아요!(일동웃음)
Q. 하, 대면보고…(웃음)
김남길: 사실 작품 곳곳에 현 시국을 꼬집는 듯한, 예언적 성향이 있는 장면과 대사들이 꽤 있었어요. 그 장면들이 대부분 편집됐죠. ‘판도라’는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닌 재난극이잖아요. 그 정체성 때문에 감독님이 고민 끝에 일부 장면들을 빼셨더라고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Q.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됐습니다. 배우 입장에서는 느끼는 바가 남다를 텐데요.
김남길: 우리(배우들도)도 듣는 입장이다보니 “그랬어? 이거 왜 바뀌었어?” 이런 저런 궁금증과 물음들이 있었어요. 촬영장소도 그랬죠. 원래는 부산 기장 지역에서 찍기로 사전 합의가 돼 있었어요. 배우들이 현장 견학도 끝낸 상태였는데 갑자기 촬영을 연기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지역주민들이 반대한다고요. 이 이유에 대해 말들이 무성했죠. 결국 강원도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어요.
#지난해 7월 촬영을 마친 ‘판도라’는 당초 영화진흥위원회 측이 민간 투자운용사에 위탁한 모태펀드의 투자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이유 없이 해당 투자가 철회되면서 외압 의혹을 받은바 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한때를 조명한 영화 ‘변호인’으로 인해 정권으로부터 ‘미운 털’이 박혔다는 NEW가 ‘판도라’로 또 한 번 불이익을 당하는 게 아니냐는 뒤숭숭한 소문이 충무로에 떠돌았다. 부산 기장 지역 촬영장이 갑자기 엎어진 것과 관련해서는 한국수력원자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Q. 국가 공기업에서 ‘판도라’ 촬영 협조 요청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는 건 기정사실이죠.
김남길: 감독님이나 제작자 분들은 아마 많이 시달렸을 거예요. 배우들에겐 연기에 지장이 될까봐 이야기를 안 했지만요. 그걸 모르는 저희는 술자리에서 “왜, 자꾸 기다리래.~ 너무 게으른 거 아니야” 농담을 하곤 했는데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던 거죠.
Q. 말은 그렇게 해도 당신에게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 않았나 싶어요. 배우들이 찍힐까봐 이 영화를 기피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출연 결정에 부담은 없으셨나요.
김남길: 저는 그런 게 부담스럽지 않아요. 일단 영화는 영화로 보면 되지, 라는 마음이 있고요…그리고 ‘너 그러다 찍힌다’ 하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해요. 눈치 보면서 도망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결국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잘하는 것을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랬을 때 저는 연기로 목소리를 전하는 거죠. 사실 제가 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요. ‘잘한다, 잘한다’ 하면 하기 싫어져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고.(웃음) 그래서 부담? 글쎄요. 부담이라는 단어도 거창해 보일까봐 좀 그래요.
Q. ‘변호인’ 송강호 씨의 경우도 있죠.
김남길: 강호 형이야말로 부담이 있었을 수 있죠. 전면에 서서 특정 인물을 이야기 했어야 했으니까요. 강호 형에 비하면, 저야~
Q. 최근 ‘최순실 게이트’가 모든 관심을 빨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김남길: 저는 이게 맞다고 봐요. 셀럽의 인터뷰가 포털 메인에 올라오고 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대요. 정치나 경제가 메인에 다뤄지는 게 당연하다고 봐요. 그 동안 너무 많은 연예기사들이 포털을 장악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Q. 지금의 상황에 당신에게 끼친 영향이 있을까요.
김남길: 요즘 반성을 많이 해요. 정치에 너무 무관심 했던 게 아닌가 하고요.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너무 ‘모르쇠’로 살다보니 김진태 의원 같은 사람이 ‘촛불은 촛불일 뿐, 결국 바람 불면 꺼진다’는 이야기도 내뱉은 거죠. 평소 정치인들이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해요. 화가 나지만 우리도 반성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반성을 하는 것에서부터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거죠. ‘최순실 게이트’ 이후 ‘내 탓이요, 이건 책임이요’라고 얘기한 정치인이 아무도 없어요. 남 탓만 하고 비방만 하죠. 잘못한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탄핵도 중요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게 꼭 필요하다고 봐요. 진실이 이대로 묻힐까봐 걱정돼요. 이렇게까지 한 목소리를 외치는데 모든 게 흐지부지돼서 문제가 묻힌다면 국민들은 분명 실의에 빠질 거예요.
Q. 자의든 타의든 최근 배우/스타들의 사회적인 발언이 이어지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동안 스타들이 자신의 사회적 의견을 밝히는 것에 대해 자기 검열이 너무 심하다고 느꼈었거든요.
김남길: 사회적인 관심이 없어서인지, 몸을 사려서인지, 조금 더 두고 보겠다는 건지는 배우들마다 다르겠죠. 개인적으로는 신중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가령 시사프로그램과 같은 공간이 주어진다면 다르겠죠. 하지만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리에서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것에는 조금 신중하자는 게 있어요. 우리가 가진 말의 파급력이라는 게 있기에 자칫 행사의 본질을 흐릴 수도 있으니까요. 확실한 건, 이 시국을 이용해서 이미지를 홍보한다거나 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거예요. 그건 정말로 반대합니다.
신중하고자 하는 김남길이 찾은 방법이 그래서 ‘길스토리’다. 비영리 NGO 단체 ‘길스토리’의 대표로서 김남길은 지속 가능한 사회 공헌 활동들을 찾고 행하고 퍼뜨리고 있다. ‘길스토리’ 질문에 쑥스러워하며 “이 역시 이벤트로 보일까봐 홍보를 안 한다. 우리가 별로 한 게 없다니까~”라고 자세를 낮추는 그의 웃음 끝에서 진짜 마음이 발견된다. 말보다는 행동, 위에서 아래로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퍼져나가는 진심. 김남길이 추구하는 진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