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영화에 닿는 방법. ‘엣나인필름’ 정상진 대표를 볼 때마다 늘 생각했다. 영화의 힘을 믿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노선을 의미 있게 그려나가고 있는 사람이라고.예술영화전용관 ‘아트나인’의 주인이자, 숨어있는 외화들을 수입해 국내에 소개하는 메신저이자, 사정이 녹록치 않은 저예산 영화들을 발굴하고 홍보하는 열혈 마케터인 동시에 잘못된 영화 정책에 맞서는 투사이기도 한 그는, 영화가 머무르는 자리에 스윽 나타나 자신이 내밀 수 있는 도움의 에너지를 조용히 휘두른 후 사라지곤 했다.
그 다양한 행보보다 늘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떤 일이든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쏟아내는 에너지였는데, 영화를 본성적으로 즐기지 않는 자가 보여주기 힘든 그 무엇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계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그를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일이었다.
박근혜 정부 4년. 유신의 망령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문화계에 침투했다. 정부의 문화계 사찰과 관련된 의혹은 늘 뒤숭숭하게 제기돼 왔지만, 그 실체가 상상 그 이상의 규모로, 그것도 조직적으로 짜여져 왔다는 점에서 ‘충격’이란 단어가 자연스레 호출된다. 정상진 대표의 ‘엣나인필름’은 2012년 배급한 영화 ‘남영동1985년’으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를 만나기 위해 사당동에 위치한 ‘아트나인’을 찾은 건, 2016년을 이틀 남긴 12월 29일.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인터뷰였다.
Q. ‘엣나인필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해서 ‘자백’(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정상진: 저도 사실 그랬어요. SBS로부터 관련 연락을 받았을 때 ‘남영동1985’(2012)때문이라고 해서 조금 놀랐죠.
Q. ‘남영동1985’로 명단에 오르지 않으셨어도 아마 ‘자백’으로…
정상진: 하하하. 네. 어차피 올라갈 사람이었을 겁니다.
Q.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남영동1985’는 당시 영화제에서도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대선 전이라는 분위기와 맞물려, CJ E&M·롯데엔터테인먼트·쇼박스 등 국내 대형배급사에서 끝내 배급하지 않았죠. 그때 나선 게 ‘엣나인필름’입니다.
정상진: 저에겐 영광이었죠. 권칠인 감독님이 대뜸 그러시는 거예요. “가만, 정 대표는 영화관도 가지고 있으니 ‘엣나인필름’에서 배급하는 건 어때?” 그 순간 가슴이 콩닥 콩닥거렸어요. ‘이건 안 돼!’가 아니라, ‘이걸 내가 배급해도 돼? 이런 의미 있는 영화를 감히?’ 라는 마음이 들었죠. 사실 제가 대학 다닐 때 사회운동에 관심 있었던 사람이 아니에요. 그에 대한 부채감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정지영 감독님에게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하고는 부산에서 올라오자마자 고(故) 김근태 의원님 묘를 찾아갔어요. 너무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확인해야 할 것 같았어요. 배급을 하는 사람이 위축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거든요.
Q. 그곳에서 응답을 받으셨군요.
정상진: 절을 하고 묘 가까이에 3시간 정도 앉아 있었나? 10월이라 살짝 쌀쌀했는데 갑자기 나비가 날아왔어요. 뭐랄까. 제겐 드라마 같은 순간이었죠. 그런 우연의 힘을 믿는 게 웃길 수 있지만, 그 순간 그렇게 되더라고요. 배급을 결심했죠.
# 물증이 없었을 뿐, 심증은 있었죠
Q. 블랙리스트 보도가 나간 후 인터뷰 요청이 많았을 줄 압니다.
정상진: 정치부에서 연락이 특히 많이 오는데 그 쪽 인터뷰는 지양하는 게 좋겠다 싶어요. 어제 YTN을 만나긴 했습니다.
Q. YTN에서 이야기한 조윤선 문화체육부 장관 관련 에피소드가 흥미롭더군요.
정상진: 어쩌다보니 그게 특종처럼…조윤선 장관을 처음 본 건, 2012년 박근혜 대선캠프 때였어요. 박근혜 캠프 대변이었던 조 의원 쪽 분이 어느 날 저를 보자고 하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그들은 이념 보다는 돈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눴던 것 같아요.
Q. 돈이요?
정상진: 제가 멀티플렉스 극장(씨너스)을 운영하고 있었던지라, 그 쪽에서는 저를 영화계에서 나름 자본이 있는 사람이라고 분류했던 거죠. 그때가 ‘남영동1985’를 배급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였고요.
Q. ‘남영동1985’를 배급하는 분인 줄은 또 몰랐던 거군요.
정상진: 네. 저는 순진한 생각에 ‘그래, ‘남영동1985’같은 영화는 여야를 막론하고 다 봐야 지. 그래야 누가 정권을 잡든 역사가 반복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어요. 인권적인 차원에서 만나자는 제안에 응했던 거죠. 아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만났을 겁니다. 박근혜 당시 후보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인사를 하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친절하더라고요. 그런데 악수를 하면서 제가 ‘남영동1985’를 배급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네?” 놀라면서 손을 뿌리치더라고요. 그리곤 편 가르기를 했어요. “왜 다른 편이 여기 와서 이래요?”라고.
Q. 돌변했군요. 박근혜 후보가 오기 전에 빨리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요.
정상진: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선 당황스럽죠. 놀랍고. “이 사람, 진짜 위험한 사람”이라고 면전에 이야기 하고 돌아온 기억이 납니다.
Q. 이후 ‘엣나인필름’은 문체부 예산을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박근혜 정부의 영화계 사찰과 검열 의혹은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인데요.
정상진: 영화인들은 정황상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물증이 없었을 뿐 심증은 있었죠. 그게 이런 식으로 수면 위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요. 확실한 건 이젠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거죠. 실체가 눈에 보이는 것과 아닌 건 다르잖아요?
Q. 다큐멘터리 ‘자백’ 역시 현 정권이 굉장히 눈엣가시로 생각할 영화입니다. ‘왕실장’이라고 불린 김기춘(전 청와대 비서실장) 씨의 거짓말 열연이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죠. ‘자백’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정상진: ‘자백’ 프로듀서가 ‘트루맛쇼’(2011) ‘MB의 추억’(2012)을 만든 김재환 감독이에요. 하루는 ‘자백’의 밑그림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후 최승호 감독님을 만나서 스케치 한 걸 봤어요. 제가 ‘남영동1985’를 통해 고문피해자들을 만났는데, ‘자백’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는 거예요. 하, ‘이건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자백’은 너무 뜨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는 마케팅-배급만 총괄하고, 제 이름이 아닌 제3의 회사를 내세워서 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역시나 스크린 잡기가 녹록치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앞장서서 하자’가 된 거죠.
Q. ‘자백’은 시사회 대관 잡기도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초반에는 메가박스에서만 상영이 됐죠. CGV-롯데는 외면했고요.
정상진: 그들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해요. 저보다 조금은 더 큰 사업을 하는 곳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최순실이 CJ그룹 이미경 부회장도 퇴진 압박하는 상황에서, CGV 프로그램 팀이 ‘자백’을 멋지게 틀어줬다고 쳐요. 박근혜 정부에서 “이거 뭐야?”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이번 블랙리스트를 통해 대한민국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증명이 됐잖아요. 이번 기회에 여러 악습들이 척결됐으면 좋겠어요. 지금껏 위축돼서 자기검열을 한 분들이 있다면, 이젠 힘을 내줬으면 좋겠고요.
Q.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이젠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예술인들의 자괴감 아닌 자괴감도 들립니다.(웃음) 이외수 씨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빠져 극심한 소외감을 금치 못했다”고 했죠. 안도현 시인은 “내 이름이 명단에 없으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펴봤다”고 했고요.
정상진: 저는 이념적으로 투철한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눈뜨고 나니 의도치 않게 독립투사처럼 돼 있는데, 그에 대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제가 뼛속까지 트레이닝이 돼서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이라면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게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냥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다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영화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노하우가 생긴 정도에요. 제 상식선에서, 우리 극장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준의 영화라는 판단이 되면 상영을 하는 것일 뿐이죠.
Q. 불이익에 대한 걱정은 없으셨나요.
정상진: 없었어요. 그로 인해 내가 협박을 받을 것이다?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지금도 혹자는 그래요. “밤길 조심하라”고.(웃음) 뭐, 때리면 맞죠.
Q. 지금까지 14만 관객이 ‘자백’을 봤습니다. 적지 않은 숫자죠.
정상진: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가 벌어진 김에 ‘남영동1985’와 ‘자백’을 3월에 함께 상영할 계획도 세우고 있어요. ‘관객과의 대화’는 고문피해자 분들과 간첩조작단 사건에 연루된 분들을 모시고 ‘아트나인’ 테라스에서 하면 어떨까 싶어요.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 공간은 일반 멀티플렉스 극장처럼 소비하는 공간은 아니니까요.
Q. 위안부를 다룬 영화 ‘눈길’도 개봉 준비 중인 걸로 알아요.
정상진: (용산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2012) 속편도 곧 합니다. ‘공동정범’이란 이름으로요.
Q.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다우시군요. 2016년에는 ‘자백’도 있었지만 ‘우리들’ 같은 의미있는 독립영화도 배급했습니다.
정상진: ‘우리들’의 경우 저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의 프로젝트였다는 점이에요. CJ에서 제작을 돕고(버터플라이 프로젝트) 중소배급사인 저희가 배급했죠. 아무도 이렇게까지 잘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영화인데, 좋은 성과를 낸 것에 대해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요. ‘글로리데이’도 대기업과 협업을 한 경우인데 일부 독립영화 하시는 분들은 “너무 자본에 종속당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세요. 하지만 저는 그런 우려는 건강한 우려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의 합의를 통한 콜라보레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로인해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님은 차기작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어요. ‘글로리데이’ 최정열 감독님도 그렇고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지점들이 2016년에 가장 뿌듯합니다. 뉴스타파가 제작한 ‘자백’의 경우처럼 대안언론과의 상생도 계속 해 나갈 생각이에요.
# 패션 사업-자동차 잡지 발행→다시 영화계로
Q. 영화 현장에 계셨다고 들었어요.
정상진: 연출부-촬영부로 현장 경험을 했어요. 송영수 감독님의 ‘창 밖에 잠수교가 보인다’(1985) 등에 스태프로 참여했는데, 나름 파란만장합니다. 할리우드에서 일 해 보겠다고 막무가내로 감독 찾아가고 그랬거든요.
Q. 할리우드요? 누구를 찾아서요?
정상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일동웃음) 중앙대 선배 중에 할리우드에서 ‘신의 아그네스’를 제작하신 분이 계세요. 저보다 27학번 정도 위이시니 진짜 대선배님이죠. 안면부지인데, 그 분 전화번호 하나 달랑 가지고 미국에 가서 매일 전화를 했어요. “선배님 기침 하셨습니까.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30기 정상진입니다.” “누구?” “중대 30기 정상진입니다” “어? 나는 서라벌 대학 나왔는데?” “아, 서라벌이 중앙대로 바뀌었습니다.” “왜 전화 했나” “영화를 하는데 메이저 시장인 할리우드에서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매일 연락을 하니까 만나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그 분을 통해 스필버그를 진짜 만났어요. 그때 제가 영어만 조금 더 잘 됐더라도…(웃음)
Q. 진정한 할리우드의 키드가 됐겠군요.(웃음) 현장일은 왜 그만 두셨습니까.
정상진: 군대를 다녀 온 후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유학 다녀 온 후에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면 어떨까 싶었죠. 그런데 당시 영화 쪽은 먹고 살 수 있는 페이가 아니었어요. 돈을 쓰면서 부모님에게 창작활동을 하겠다고 못하겠더라고요. 시나리오 쓸 자신도 없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이후 방송국 외주로 일했는데, 역시 내 길이 아니 것 같아서 광고회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그게 잘 풀렸죠. 서태지가 입어서 히트를 친 ‘스톰’을 비롯, ‘보이런던’ ‘겟유즈드’ 등으로 돈을 벌었어요. 해외 청바지 브랜드를 론칭 시켜서 성공도 했고요.
Q. 추억의 90년대 인기 브랜드들이군요.(웃음)
정상진: 네. 그렇게 패션 쪽에서 몇 년 있었는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재수까지 해서 어렵게 중앙대에 들어갔는데, 영화는 안 하고 뭐 하는 거지?’ 돈벌이에 치중하는 제 자신을 되돌아 본 거죠. 영화로 돌아가야지 할 때쯤 하루아침에 돈을 날렸어요.
Q. 아… 파란만장이라 표현하신 이유를 알겠네요.
정상진: 광고에서 돈은 번 후, 잡지를 잠시 했어요. 미국 다녀오면서 본 건 있어가지고 자동차 잡지 무가지를 한 거죠.(웃음) 무가지는 광고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광고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IMF 때 쫄딱 망했지 뭐예요. 이후 칩거를 하다가 자동차극장을 떠올렸어요. 그렇게 1998년도에 남산 자동차극장을 하면서 영화와 다시 연을 맺은 거죠.
Q. 1998년도면 우리나라에 멀티플렉스가…
정상진: 자, 1998년도 8월에 강변에 CGV가 처음으로 생깁니다. ‘지하철 타고 우리는 영화 보러 간다’라는 컨셉으로요. 그때 제가 남산자동차 극장을 서울 시내에 최초로 오픈한 거예요. ‘남들은 지하철 타고 영화 보러 갈 때 우리는 자동차에서 영화를 본다’라는 카피 아래요.(웃음) 잘 됐죠. 그때 돈을 참 많이 벌었어요. 그 돈으로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내에 씨너스(이채)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그때가 2004년도입니다. 이후 씨너스 이수를 열었고요.
Q. 이래서 조윤선 문화체육부 장관 측에서 ‘자본이 있는 사람’으로 분류를 했나봅니다.(웃음)
정상진: 제가 돈은 없는데 배포가 큽니다.(웃음) 다, 은행 빚이에요. 부채가 어마어마합니다.
# 예술영화전용관 그리고, 자비에 돌란
Q. 이후 행보가 흥미롭습니다. 2013년에 예술영화 전용관 ‘아트나인’을 여셨죠. 손실을 각오하고 말이죠. 그 사이에 ‘엣나잇필름’이란 이름으로 외화 수입-배급에도 뛰어드셨고요.
정상진: 극장 운영만 하고 있을 때, 운명처럼 다가온 게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어둠의 아이들’(2008)이에요.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영화란 이런 것이구나’ 감동 받았죠. 그런데 주위에서 아무도 그 영화를 수입하지 않는 거예요. 1년 정도 가위에 눌렸던 것 같아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일본에 갔다가 그 영화를 수입하게 됐어요. 영화 수입의 ‘수’자, 배급의 ‘배’자도 모르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렇게 수입-배급을 시작했습니다.
Q. 이렇게 열심히 달린 원동력은 뭘까요.
정상진: 철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저는 영화의 영향력을 믿어요. 저를 자극하는 사람이 시기마다 나타나기도 했고요. 최근에는 ‘액트 오브 킬링’(2013,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다룬 다큐로 엣나인이 배급했다)을 만든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 그런 감독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에 큰 자극을 받습니다. 오래 전에 스필버그를 찾아갔던 것도 같은 이유에요. 그는 ‘E,T’같은 오락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지만, ‘컬러 퍼플’ ‘쉰들러 리스트’ 같은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감독이기도 하니까요.
Q. 예술영화 전용관 ‘아트나인’의 대표인 동시에 멀티플렉스를 보유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예술영화와 저예산 영화를 배급하기도 하고요. 멀티플렉스 관련 비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웃음)
정상진: 모순이죠, 사실.
Q. 중립을 지키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실제로 지난해 3월 좌석차등제를 실시한 CGV가 ‘가격인상을 위한 꼼수를 부린다’는 비난을 받을 때 위탁점을 운영하는 극장주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기도 하셨죠.
정상진: 많은 논쟁이 있을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나에요. 여태껏 영화산업에 있어서 영화관주나 영화관을 운영하는 전문 인력들이 영화인으로 분류된 적이 없습니다. 제도에 대한 기초적인 담론이라도 이야기 돼야 하는데 그런 라운드 테이블조차 없는 게 아쉬운 거죠. 영화관이 어떤 입장인지 모르는 제작자나 프로듀서, 감독, 배급사 관계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에 2600개의 스크린이 있는데, 이 스크린들이 다 돈을 버느냐! 아니거든요. 한국에 CGV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한극장-서울극장도 사실상 이전의 명성이지 지금은 시사회 같은 게 없으면 먹고 살기 힘들어요. 직영점 아닌 위탁지점들을 또 어떻고요. 10만원 하는 배너 하나 만드는데 부담을 느끼는 곳도 수두룩합니다. 영화관들의 컨디션들을 알아야 한다고 봐요.
Q. ‘아트나인’의 경쟁력은 공간 자체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극장과 갤러리 그리고 카페/식당(잇나인)이 결합 돼 있는데요, 아까부터 쭉 지켜보니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이 상당히 많군요.
정상진: 아, 저희 음식 안 드셔 보셨군요! 맛있는데.(웃음) 음식 장사는 태어나서 처음 해 봐요. 컨설팅도 받고 이태리 셰프도 모셔보고, 별의 별 걸 다 해 봤는데 실패했죠.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막내부터 시작해서 올라온 애들끼리 팀을 이룬 다음부터 잘 되기 시작했어요. 진짜 맛있습니다.
Q. 자부심이 느껴지는군요.
정상진: 자부심, 있어요! ‘서울국제음식영화제’를 이곳에서 했었는데, 그때 스타 셰프들도 놀랐거든요. “맛있네요?” 하면서.
Q. ‘엣나인필름’하면 자비에 돌란을 빼놓을 수 없어요. 국내에 들어온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모두 수입-배급하며 그를 알렸죠. 수입사들 사이에서는 돌란 영화는 오퍼가 들어와도 ‘엣나인필름’ 때문에 거절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웃음)
정상진: 하하. 그래도 경쟁은 늘 치열하죠. 물론 돌란도 저희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신작이 나오면 ‘엣나인필름’과 꼭 함께하고 싶다고 저에게 멘션을 보내오기도 하거든요. 돌란의 경우처럼 신인 때부터 함께 한 건 너무 좋죠. 거장의 영화는 아무리 제가 잘 해도 뭔가 얹어 간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신인을 소개하는 역할에 훨씬 큰 재미를 느껴요.
Q. 그의 신작 ‘단지 세상의 끝’이 이번 달에 개봉하는데, 돌란 내한 한 번 추진해 주시죠.(웃음)
정상진: 아! 차기작 때, 올 것 같아요. 자비에 돌란이 할리우드에서 ‘더 데스 앤 라이프 오브 존 F 도노반’이라는 영화를 만드는데, 월드 프로모션이 예정돼 있거든요. 아마 아시아 프로모션을 한국에서 제일 먼저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제가 전세계에서 돌란의 단편부터 장편 연출작 판권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웃음) 그도 그걸 알고 존경을 해 주는 것 같아요.
Q.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계시는데, 그래서 궁금합니다. 다음 행보가.
정상진: 다음엔 뭘 해야 할까. 예술영화전용관을 조금 더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가끔씩 손님 중에 “우리 동네에도 ‘아트나인’이 있었으며 좋겠어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저 역시 그럴 것 같더라고요. 내 집 옆에 ‘아트나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처음에는 ‘아트나인’을 해외로 가지고 나갈 생각이었어요. 해외에 한국영화 전용관을 세워서 한국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싶었거든요. 지금은 조금 바뀌었어요. 국내에 ‘아트나인’을 9개 정도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