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모를 일이다. 이원근에게는 어디쯤에서 멈추어버린 듯한 시간의 흔적이 있다. 시간의 틈을 열고 달아난 그의 분신이 소년의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 것 같은 오묘한 느낌. 길고 곧게 뻗은 그의 몸 윤곽은, 아이처럼 가냘프면서도 남자처럼 강인해서, 그 모호함에 불을 붙인다. 데인 드한의 ‘퇴폐미와 순수함’이 좋다는 이원근은 자신에게도 ‘순수와 퇴폐’라는 양립하기 힘든 무기가 있다는 걸 알까. 자물쇠를 걸어 잠근 듯한, 그래서 열어보게 싶게 하는, 자꾸 궁금해지는 얼굴이다.무사 ‘운’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해를 품은 달’을 시작으로 ‘발칙하게 고고’ ‘그물’ ‘굿와이프’ ‘여교사’를 지나 ‘환절기’와 ‘괴물들’을 향하고 있는 이원근의 지금. 그의 시간들이 조금씩 열린다.
Q. 월요일 오전이에요. 직장인들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인데, 배우에겐 다르겠죠?
이원근: 네.(웃음) 주말과 평일의 경계가 없어요. 저는 쉴 때에도 바짝 긴장을 하고 있는 편이에요. 최근 ‘괴물들’이라는 작품을 끝냈는데, 쉬면서 영화 속 캐릭터들을 따라해 보고 있어요.
Q. 최근엔 어떤 캐릭터를 따라했나요?
이원근: 데인 드한을 정말, 좋아해요.
Q. 순수와 퇴폐미를 겸비한 배우죠.
이원근: 맞아요. 그래서 저의 롤모델이죠. 목소리 자체는 미성인데 거기에서 남자 냄새를 풍기니까 너무 신비로워요. 최근 그의 영화 ‘라이프’ 속 캐릭터를 따라해 봤어요. 하면서 좀 창피하긴 했지만요.
Q. 이원근에게도 순수와 퇴폐미가 공존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표정일 땐 나쁜 남자 같은데, 지금처럼 웃을 땐…아휴~(웃음)
이원근: 하하. 웃을 때와 아닐 때 이미지가 다르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Q. 웃을 때 눈에 그려지는 초승달. 장점인 건 알죠?
이원근: 예전엔 싫어했어요. 부모님께 “왜 내 눈은 이렇게 작냐”고 하곤 했죠.(웃음) 지금은 저도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Q. 이 웃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쓰면 마음을 얻는데 백발백중이겠다 싶은데 그런 적 없어요?
이원근: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웃음이 나지 않을까요?(웃음) 그리고 그 웃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결국 티가 나는 것 같아요. 가짜가 싫어서 최대한 솔직 하려고 해요
Q.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다른 느낌이 들어요.
이원근: 사람에게는 여러 모습이 있다고 하잖아요? 수줍음이 많은 쪽이었는데, 이 일을 하면도 제 안의 다른 면모들을 발견하고 있어요. 성격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는 것 같고요.
Q. 작품에 따라서도 달라져요?
이원근: 작품을 타지는 않아요. 캐릭터에 몰입하다보면 잠깐씩 기분이 업/다운되기는 하는데, 그런 건 다행히 금방 회복해요. 평상시에는 똑같아요. 누굴 대하든. 어떤 작품을 하든.
Q. 좋네요. 캐릭터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자칫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할 수 있을 테니.
이원근: 그래서 남들 앞에서 내색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나로 인해 누군가가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Q. 최근, 본인의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게 있었다면요?
이원근: 핑크색! 핑크색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끌려요. 제 핸드폰도 핑크색이에요. 핑크색 맨투맨 티도 있죠. 제 성향이 밝아진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이전엔 블랙에 가까웠거든요.
Q. 친구들과 있을 때의 이원근은 어때요?
이원근: 음…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는 제가 계획을 세우는 편이에요. 리더, 이런 건 아니고요, 실행에 있어 막히는 게 없도록 예방 차원에서 이것저것 대비를 해 둬요
Q. 총무 스타일이군요!
이원근: 맞아요~ 리더까지는 아니고, 총무가 딱 맞아요. 영수증도 꼼꼼하게 챙기는 편입니다. 약간 피곤한 스타일인긴 한데, 나 하나 피곤하면 남들이 편하니까 좋아요.
Q. 가끔은 누군가가 해주는 대로 그냥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이원근: 그러다가도 어느새 제가 주도하고 있어요. “그건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내가 할까?” 하면서요.(웃음) 제가 낫다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경험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Q. 연기할 때가 궁금하네요. 연기할 때에도 의견을 많이 개진하나요?
이원근: ‘여교사’의 경우 김태용 감독님이 거의 만들어 주셨어요. 저는 도화지, 감독님은 물감이었죠. 제 캐릭터의 A부터 Z까지 대사 톤부터 뉘앙스 하나하나 다 잡아주신 것 같아요. 감독님은 ‘재하(이원근)가 혜영(유인영)을 대하는 태도가 단순히 이성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듯한 느낌을 주길 원하셨어요. 마지막 신에서 혜영 앞에서 엉엉 울 때 마치 갓난아이처럼 울잖아요? 저는 처음에 예쁘게 눈물이 똑 흐르는 걸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그 감정이 아니라며 다큐멘터리 링크를 보내주셨어요.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라는 의미였죠.
Q. 어떤 다큐였죠?
이원근: 부인의 죽음을 맞이한 남편의 모습이 담긴 다큐였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의 모습. 앉았다 누웠다 뒹굴었다…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더라고요. 보는데 너무 슬펐어요. 그 감정을 재하에게 끌어오려고 했죠. 다행히 감독님이 저에게 제하를 억지로 입히려 하지 않으셨어요, 제 안에서 제하를 찾고, 그 다음에 제하를 입히려 하셨죠. 이야기를 참 많이 한 현장이었어요.
Q. ‘여교사’ 이전에 김기덕 감독의 ‘그물’을 했어요. 김기덕 감독은 김태용 감독과 연출 스타일이 많이 달랐을 텐데요. 촬영 속도도 굉장히 빠르고요.
이원근: 그때는 2주의 마법이었어요. 오디션 보고 삼일 있다가 합격 연락 받고, 이틀 있다가 전체 리딩 하고, 하루 쉬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죠. 그리고 일주일 만에 촬영을 끝냈는데 촬영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화장실 갈 때, 식사할 때, 막간을 이용해 여쭤 볼 수밖에 없었죠. 김기덕 감독님은 거의 한 테이크에 오케이를 하셨어요. 전 저의 부족함이 너무 많이 보이니까 ‘이거 어쩌지? 망했다’ 했죠. 그런데 김기덕 감독님이 대단하신 게, 당신 머릿속에 콘티가 꽉 짜여 있어서인지 그런 상황에서도 장면 통제를 완벽하게 하시더라고요. 혼자 다 해내시는 걸 보며 대단하다 싶었죠.
Q. 살면서 재하처럼 엉엉 울어 본 적 있어요?
이원근: 소리 죽여 남몰래 흐느낀 적은 있지만, 그렇게 소리 내서 울어 본 건 처음이에요.
Q. 크게 울만한 상황이 없었던 건가요? 아니면 그런 상황이 와도 참는 건가요?
이원근: 스타일상 그러지 않아요. 타인 앞에서 슬픔을 내색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요.
Q. 약해 보일까봐?
이원근: 음…그보다는, 나 혼자만 알고 싶은 모습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사실 눈물이 많긴 하거든요.
Q. ‘여교사’ 같은 연상연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몇 편 있죠. 외국의 경우 케이트 윈슬렛-데이빗 크로스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소피아 마일즈-제이미 벨의 ‘할람 포’(2007)가 있어요. 우리의 경우에는 김정은-이태성의 ‘사랑니’(2005)가 있고요.
이원근: 아! 김태용 감독님이 레퍼런스로 몇 가지 영화를 보내주셨어요. 그 중 하나가 ‘더 리더’였어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2001)도 있었죠.
Q. 그러고보니 ‘피아니스트’와 ‘사랑니’의 분위가 살짝 겹치는군요.
이원근: 그렇죠?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피아니스트’에서의 남자 주인공은 대놓고 끼를 부리는 쪽인데, 너는 알 듯 모를 듯 오묘하게 했으면 좋겠다”고요. 재하가 쥐고 있는 패를 모두 보여주지 않는 게, 저에겐 나름의 숙제였어요.
Q. 사랑 앞에서 나이는 걸림돌일까요?
이원근: 아니요. 저는 나이에 연연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소통이죠. 말이 안 통하면 모든 게 단절 되니까요.
Q. 선생과 학생의 사랑에 대해서는요? 그러고 보니 개봉을 기다리는 ‘환절기’에서도 쉽지 않은 사랑을 연기 했죠?
이원근: ‘여교사’의 경우 분명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랑이기는 해요. 청소년보호법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닐 테죠. 학생일 때는 또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 경솔할 수 있잖아요. 그땐 위험한 사랑에 빠진 학생도, 그걸 컨트롤 하지 못하는 어른도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동성애를 그린 ‘환절기’의 경우에는 일상적으로 다가가려고 했어요. 동성애도 그냥 사랑이라 생각하며 연기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이성에게 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Q. 개인적으로 이원근이라는 배우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낀 건 ‘굿와이프’에서에요. ‘굿와이프’에서의 로펌 MJ 신입 변호사 이준호도 패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 인물이었죠.
이원근: 사실 ‘굿와이프’ 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죠. 당시 ‘굿와이프’ 외에 영화 ‘환절기’와 중국 웹드라마 ‘두근두근 스파이크’를 동시에 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촬영 전에 대본을 통으로 외워야 해요. 안 그러면 불안해요. 그러니까 저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노력을 해야 하는 사람인 거죠. 그런데 세 작품을 하다 보니 과부하가 오더라고요. 극 분위기들도 너무 달라서 스스로를 컨트롤하기 힘들었어요. 그러다보니 외웠던 대사도 까먹고…정말 답답한 시간이었죠. 그래서 ‘굿와이프’는 애정만큼 제겐 아쉬움도 있어요.
Q. 필모를 둘러보면 참 흥미로워요. 특히 영화 쪽이 그런데, 저예산 독립영화들에 쉬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이원근: 시나리오는 회사로부터 조언과 도움을 많이 받아요. 저는 캐릭터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요. 캐릭터가 얄밉든, 영악하든, 슬프든, 안타깝든, 이걸 내가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Q. 교복 입은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는데, 학창시절이 아픔으로 남아있다고 들었어요.(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원근: 그때의 아픈 기억은 씻어낼 수 없을 것 같아요. 약간 덤덤해질 뿐.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죠. 제가 저항을 한 번도 못해봤어요. 당하고만 있었는데, 그때 저의 자아가 많이 형성된 것 같아요. 남들과 조금은 다르게, 조금은 더 외롭게, 조금은 더 어둡게…그런 채로 학창시절을 보낸 거죠.
Q.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꺼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강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
이원근: 그런가요? 얼마 전에 촬영한 ‘괴물들’이 10대들의 권력과 폭력의 비극을 다뤄요. 제가 연기한 캐릭터는 권력에 맞서 저항을 하는데, 그게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마음 속에 담아 둔 걸, 간접 체험한 기분이랄까. 연기하면서 너무 속 시원했어요. 좋았죠. 이래서 연기에 끌리는구나 싶었죠. 다른 인물로 살아 볼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 너무 매력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