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윤준필 기자]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준결승전. 박성현 선수가 쏜 화살은 과녁 정중앙, 엑스텐을 맞혔다. 과녁 정중앙에서 선수들이 쏜 화살을 촬영하던 카메라가 깨지는 것은 덤이었다.
배우 하승리의 데뷔작은 1999년 '청춘의 덫'이다. 1999년은 그가 만 4살이던 해였다. 어린 아이가 워낙 똘망똘망하게 연기를 잘해서였을까. '청춘의 덫'은 꽤 오랫동안 하승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하승리는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을 통해 23년 전 드라마 '청춘의 덫' 아역이라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깼다. 엑스텐을 쏜 것이다.
최근 서울 동작구 비즈엔터 편집국을 찾은 하승리는 '지금 우리 학교는' 공개 전 3만 명이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67만 명까지 늘어났다면서 "'이건 과연 어느 나라 말일까' 궁금할 정도로 전 세계 언어로 메시지가 온다"라고 밝혔다. 이어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서 밖을 다니고, 직접 대중을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우리 드라마의 인기가 피부로 확 체감되진 않는다"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은 넷플릭스가 집계하는 '넷플릭스 톱10'에 3주 연속 글로벌 톱10 TV 비영어부문 1위를 차지하며 오랜 기간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9년 주동근 작가가 연재한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지우학'은 학교에서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지역사회까지 번진 가운데 학교에 고립된 학생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담았다.
하승리는 '지우학'에서 효산고등학교 3학년 양궁부 장하리 역을 맡았다. 지역 예선에서 떨어지고 좀비 사태가 발발한 효산고로 돌아온 뒤 동생 장우진(손상연)을 찾기 위해 정민재(진호은)와 학교 건물 안을 돌아다닌다. 그러던 중 박미진(이은샘), 유준성(양한열)을 만나, 함께 생존을 모색해 나간다.
"원작 웹툰을 재미있게 보기도 했고, 꽤 오래 연기를 했지만 장르물에 출연하는 건 처음이어서 기대를 많이 했어요. 캐스팅됐을 땐 대본이 4부까지 있었는데, 제 분량이 너무 없는 거예요. 걱정과 실망을 했었는데 감독님께 하리 캐릭터에 대한 이후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죠. (웃음)"
하승리는 이번 역할을 위해 2020 하계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금메달리스트 강채영 선수에게 직접 양궁을 배웠다. 하승리는 "활을 당기는 것도 기술과 감이 있어야 하더라"라며 "양궁은 근육의 움직임을 컨트롤해야 하는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50m 떨어진 과녁까지 쏴 본 적이 있다며 "컨디션이 좋을 때는 엑스텐을 쏜 적도 있었다"라고 자랑했다.
하승리는 2017년 KBS 드라마 '학교 2017' 이후 5년 만에 고등학생을 연기했다. '지우학' 촬영 당시 26세였던 하승리는 "내가 체구가 작고, 또래보다 어려보이는 편이긴 하지만 실제 고등학생 나이 또래 친구들과 연기를 한다는 게 조금 걱정됐다"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배우들도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저보다 어린 배우들, 특히 여자 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웠어요. 혹시 꼰대라고 할까 봐 엄청 조심스러웠거든요. 그런데 먼저 동생들이 다가와 장난도 치고, 부담도 풀어줬어요. 제가 웃음도 많고, 장난기가 있는 것이 보였다고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세대 차이는 조금 느꼈던 게, 그 친구들이 아이폰 신형 모델, '쇼 미 더 머니' 얘기를 하는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더라고요. 같이 사진 찍을 때 손가락으로 작게 하트 만들었다가 요즘 누가 그렇게 하냐면서 '이모' 소리까지 들었어요. (웃음)"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해왔던 만큼 하승리는 함께 '지우학'에 출연했던 어린 배우들을 응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연기한다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때로는 힘들고 가끔 상처도 받는다"라며 "함께 했던 모든 친구들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묵묵히 자기의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어 "'지우학' 친구들 중 한 명은 내게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라며 "그 고민들이 내가 이미 겪어본 일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하승리는 성인이 된 후 연기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고, 슬럼프도 겪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학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지고, 친구들이 군대로, 대학으로, 직장으로 흩어지는데 나만 소속된 곳이 없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라며 "그때부터 '난 지금 뭐 하고 있는지 거지'란 생각도 들고, 고민이 깊어지니 내가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건가 의심도 들었다"라고 고백했다.
"성인 연기자가 된 이후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성인 연기자로서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 아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기대하는 시선도 느껴지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을 느꼈어요. 뭔가 보여줘야 할 것만 같았고요. 또 아역 출신들이 많잖아요. 정말 잘 된 배우들도 있지만 소리소문없이 연기를 포기하는 친구들도 생기니까 그런 다양한 사람들과 저를 비교하게 되더라고요."
배우로서의 '사춘기'를 극복했던 방법은 하승리,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승리는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알아가고 있다"라며 "매 작품 '내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은 것들을 발견한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또 촬영하면서 내 안의 다양한 모습들이 느끼고 이걸 다양한 캐릭터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라고 밝혔다.
"'지우학'을 통해서 느낀 건 생각보다 몸을 잘 쓰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작품이 공개된 후 모니터를 하는데 계속 제가 흐느적거리더라고요? 나중에 어떤 감독님께서 그러시던데 이게 어린 시절부터 연기한 배우들의 특징이래요. 프레임 밖으로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힘 있는 움직임이 없다고 설명해주셨어요. 배우들이 왜 운동을 하고, 액션스쿨을 다니는지 알게 됐어요. 당분간 영어 공부와 함께 필라테스도 열심히 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웃음)"
5년 전, 한 인터뷰에서 하승리는 "20대에는 많은 것을 채우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간이 흐른 지금 하승리는 "75% 정도 채운 것 같다. 아직도 해야 할 것들이 많고, 겪어봐야 할 일들이 많다"라고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양궁에 비유한다면 앞으로 9점은 무조건 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10점을 쏘면 기쁘긴 하겠지만, 더 올라갈 목표가 없는 거잖아요. 10점이라는 목표를 계속해서 남겨두고, 그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