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 방송되는 KBS1 '동네한바퀴'에서는 가을을 닮아 받은 만큼 내어줄 줄 아는 이들이 사는 동네, 전주에서의 여정을 함께 한다.

한때 전주는 전라도 전 지역은 물론 제주도까지 관할했던 전라도의 실질적인 수도였다. 전주가 이토록 힘을 얻은 데엔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큰 배경이 있다. 고려가 기울어져 가던 14세기 후반, 전주에서 나고 자란 태조 이성계는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귀경하던 중 일가친지를 찾아 전주에 들렀다. 금의환향의 기쁨을 큰 잔치로 베풀기 위해서였다. 이후 국위선양을 한 장군은 곧 한 나라의 임금이 되었고 자연히 그가 머물렀던 장소는 한 고을의 자랑이 됐다. 숱한 세월이 흘러, 오목대가 위치한 작은 언덕은 한옥마을 전경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전주를 찾은 이만기는 동네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오목대에서 힘찬 첫 발걸음을 떼어본다.

만추의 한옥마을은 멋스럽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어진)를 모신 경기전부터 억겁의 시간을 이은 전동성당. 그 사이로 시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거리의 풍경까지, 과연 전주를 상징하는 관광 명소답다. 한옥 60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마을은 원래 일제강점기인 1910년 무렵, 도심을 점령하는 일본 상인들을 배격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한 오십 년, 외지에서 막 시집온 새댁 시절 친해진 한옥마을 오 총사 어머니는 그 시절 다 같이 만들어 먹던 황포묵을 생생히 기억한다. 황녹두로 만들어 노란빛을 띠는 황포묵은 전주 8미, 손은 많이 가도 여럿 푸지게 나눠먹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낯선 동네에서 50년, 꼬박 부대끼며 하나가 된 어머니들이 잘 익은 감나무 아래에서 온기를 나눈다.

맛 고장 전주의 별칭은 식재전주(食在全州). 밥걱정할 일 없다는 전주에서도 남부시장은 유독 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1473년 만들어져 무려 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남부시장은 과거 호남 최대의 물류 집산지. 완주, 김제, 익산, 군산 등 인근 각지에서 찾아온 장꾼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이들에게 한국형 패스트푸드 ‘시장표 국밥’은 맛과 속도, 포만감까지 다 채울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그 유명한 남문시장 콩나물국밥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콩나물국밥이 지겨울 땐 양대 산맥, 피순대 국밥이 있다. 그렇게 그 오랜 세월 이어온 국밥 골목은 이제 드문드문 시장 입구로, 인근 시내로 이동해 명맥만 유지할 정도다. 이곳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24시간 영업을 지속한다는 피순대국밥 부부. 식지 않는 열정만큼 뜨거운 국밥을 끓이며, 힘닿는 날까지 남부시장을 떠날 수 없다는 한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예향의 도시, 전주엔 서학동 예술마을은 원래 ‘선생촌’이라 불리는 한 낙후된 골목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은 건 어느 한 예술가 부부였다. 이들은 5년 전부터 예술가들이 가장 먼저 한 건 동네 어르신들을 초대해 다 같이 즐기는 파자마 파티, 그렇게 물꼬를 튼 손길은 ‘도시락 편지’로 이어졌다. 가을 이맘때가 되면 도시락을 만들고 손 편지를 써 나누는 일은 생각 외로 선풍적인 반응이었단다. 이만기가 동네를 도는 날, 마침 날이 맞았던지 예술가들이 도시락 배달을 부탁한다. 낯선 동네에서 이만기는 배달에 나선다.

오래전부터 전주는 곧고 단단한 대나무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이 생긴 후 전국의 수많은 부채 장인들이 전주로 모였다. ‘가재미 마을’이라 불리는 부채공방촌에서 5대를 이은 합죽선 명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그 명망을 이은 명장의 후손들은 가재미 마을이 아닌 삼천동 한 작은 빌라촌에서 살고 있다. 겨울을 앞두고 여름용 부채를 만들려나 싶지만 합죽선 작업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맘때가 한창 바쁠 시기. 10월에 베어낸 대나무를 가득 쌓아두고 가정집 옥상에서 작업하는 선자장 부자의 손이 쉴 틈 없다.

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아파트촌 사이로 풍악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이끌려 들어가 보니 모를 심고 추수해 상머슴을 뽑아 가마를 태우고 농민들의 노고를 자축하는 뜻이 있는 기접놀이 연습이 한창이다. 벼농사 끝나기 직전인 이맘때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깃발로 물꼬의 우선권을 잡은 후 대동단결하자는 의미를 지닌 기접놀이는 현재, 실제 농민이거나 한평생 농사를 지었던 어르신들이 직접 참여하고 보존, 전승하고 있다. 15살 나이부터 농악놀이에 따라다니던 한 어르신은 95세인 지금까지도 직접 기접놀이에 참여해 그 의미를 전하고 있다.

막걸리 가게가 한데 모여 있어 막걸리 골목이라고 불리는 곳을 걷던 이만기는 막걸리 궤를 잔뜩 쌓아놓은 한 가게를 발견한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기본 찬이 20가지, 여기에 주전자를 추가할 때마다 총 40여 가지의 찬이 끝도 없이 나오는 막걸리 골목의 인심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어 사장님 부부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는데, 부지런함을 무기 삼아 매일 아침 7시 남부시장으로 출근하여 직접 재료를 사고 또 직접 음식을 한다는 부부의 정성은 들을수록 대단하다. 다양하고 양 많은 찬에 남겨지는 음식들이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그 음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부부는 아낌없이 상을 채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