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방송되는 KBS1 '동네한바퀴'에서는 600년의 시간을 이어내며 매일 살아 숨 쉬는 길, 정동 한 바퀴를 걸어본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19세기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는 한때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와 독립운동가들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던 공간. 그곳은 다름 아닌 교회 내부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의 송풍실이었다. 사람 서넛 겨우 들어갈 작은 다락방 같은 곳에서 독립을 열망했던 이들은 이곳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밤을 지새웠을 터. 그들의 눈물과 땀이 남은 공간이어서 일지 이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폭격을 피할 수 없었지만 완전히 소실되진 않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지워낼 수 없고 의미 있는 이들의 진심은 영원히 기억된다.

차 없는 거리,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도 정동 길은 고즈넉하다. 이렇다 할 큰 상가도 민가도 없이 학교와 공관이 대부분이어서다. 그런데 이 정동 길에 거의 유일한, 오래된 살림집이 하나 있다. 바로 ‘정동아파트’라 쓰인 지상 6층짜리 1개동 건물이다. 1965년에 지은 아파트는 주차장과 엘리베이터가 없는, 요즘엔 보기 드문 형태이지만 지어질 당시에는 상당히 고급아파트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지금도 이 아파트 곳곳엔 옛 모습을 간직한 흥미로운 공간들이 많다. 오랜 세월만큼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대체로 편의 상 내부를 리모델링해 살고 있다. 반세기를 지키고, 곧 새로운 변신을 앞둔 삶터를 담아본다.

정동 길 원형 로터리에는 노란 우체통 하나가 있다. 익명으로 고민을 쓴 편지를 넣으면 답장을 해주겠다는 ‘온기우체통’이다. 이는 과거 힘든 시간을 거쳐 스스로 삶을 이겨내 왔던 한 청년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는데 5년에 걸쳐 이어진 이 비영리 활동은 돌담길의 작은 명소가 되고 있다. 실제로 이 우체통을 통해 한 주에 30통 이상의 편지를 받는다는 청년 조현식 씨는 뜻을 함께하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직접 손편지 답장을 쓰고 편지에 적힌 주소로 발송한다. 온기우체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이만기는 그들 곁에 앉아 온기우편함으로 보내 온 한 장의 편지를 읽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마음을 전한다.

이맘 때 울려 퍼지는 구세군 종소리는 어려운 이웃들의 희망. 사계절 중 유난히 더 혹독한 계절엔 온정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만기는 옛 구세군 사관학교로, 현재는 구세군 역사박물관으로 열린 공간 앞에서 연주를 하는 구세군 브라스밴드를 발견한다. 손과 입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도 이들이 연주를 멈출 수 없는 건 자선냄비 모금 때문이다. 브라스 밴드과 함께 시청역 앞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모금활동에 나선다. 온정을 나눌수록 커지고 더할수록 깊어진다.

정동 길에서 몇 걸음만 나오면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들. 회색 빌딩 숲 사이로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서소문은 오래된 식당들이 모여 있기로도 유명하다. 큰 대로를 따라 걷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이만기는 50년이 넘은 한 가게에 들어가 소고기영양전골을 맛본다. 어머니 대부터 이어왔다는 이곳은 지금 아들 내외가 도맡아 운영한 지 5년째라는데. 갑작스런 어머니의 부재로 엉겁결에 맡은 반백 년 식당 일이 쉬울 리는 없을 터.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건 늦깎이 인연, 가게 단골로 만난 아내 덕분이란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가장 축복받아야 할 시기, 시부모님의 병환은 새내기 부부에게 큰 역경이었다. 하지만 시련 뒤에 더 단단해진다고, 부부는 닥친 현실에 무너지지 않고 함께 이겨냈다. 이제 부부가 할 일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남긴 유산을 값지게 지켜나가야 하는 것. 큰 숙제를 안고 부부는 오늘도 어머니의 역작, 소고기영양전골을 끓인다.

오래된 공공기관, 문화시설이 많아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정동. 1980년대 이후 기존 주거지마저 대부분 사라지면서 정동은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한 동네가 됐다. 오직 정동이 좋아, 어려운 선택을 한 두 명의 젊은이가 있다. 대한제국 시절 덕수궁 정관헌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고종을 떠올리며 현대식 끽다점(다방의 원조 격으로 정동에 포진했던 카페 형태)을 연 윤장섭 씨와 어느 가을,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이 길에 반해 무려 5년 간 자리가 나길 기다린 가죽공방장 송예진 씨다. 서울 한가운데에서 새 시작을 꿈꾸는 정동 청년들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점심 무렵, 정동을 지나면 요일 불문 긴 줄이 늘어선 식당이 있다. 바로 정동극장 옆 한 추어탕 집이다. 오래된 가정집 형태의 가게는 정동을 지킨 반백 년의 역사. 이집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손으로 직접 갈아내 혀끝에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러운 맛으로 인기이다. 모계로 3대 째 세습 중, 세 여자가 똘똘 뭉쳐 작은 가게를 매일 갈고 닦는다. 이만기는 정동의 명물, 추어탕을 맛보며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 3대 모녀의 사연을 들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