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은호 기자]
‘세계의 끝’. 밴드 뷰렛이 7년 만에 발표한 정규 3집의 타이틀은 실로 상징적이다. 동명의 타이틀곡 ‘세계의 끝’에는 고통 받는 하나의 세대가 끝나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내용을 담았다. 뷰렛은 노래한다. “낡은 것은 지나고 새 것이 왔어. This is the end of the world.” 그러니까 모든 이야기의 끝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인 셈이다.
뷰렛에게도 낡은 것은 지나고 새로운 것이 왔다. 7년의 공백 끝에 발표한 정규 3집 ‘세계의 끝’은 새로운 뷰렛을 알리는 전초전 같은 음반이다. 보컬 문혜원은 “1집은 밴드 초창기의 거친 느낌, 2집은 과도기적인 음반이라면, 3집은 앞으로 나아갈 뷰렛의 전초 기지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1집은 공연에서 자주 부른 곡 위주로 담다 보니 밴드 초창기 거친 느낌이 있죠. 2집은 과도기적인 음반이에요. 제 색깔과 멤버들의 색깔, 뷰렛의 색깔이 정리되지 않았고 대중성에 대한 압박도 있었어요. 모든 게 ‘짬뽕’된 셈이죠. 공백기 후 다시 뭉쳤을 때에는 각자의 음악과 뷰렛의 음악을 분리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3집은 앞으로 나아갈 뷰렛의 전초 기지 같은 느낌입니다.”(문혜원)
공백이 길었던 만큼 내용물을 채우는 것에 집중했다. 지난해 발표한 9장의 싱글 음반 수록곡들과 신곡 9곡을 두 장의 CD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해금이 더해진 첫 트랙 ‘세 개의 눈’부터 기타리스트 이교원의 밝은 에너지가 담긴 ‘락앤롤(Rock'n Roll)’, 문혜원의 어쿠스틱 사랑이 엿보이는 ‘왜 떠났니’까지 다양한 장르를 담았다. 문혜원은 “활동 경력에 비해 발표한 음반 수가 적은데다가, 지난해 낸 싱글 9곡을 음반 형태로 간직하고 싶어서 2CD로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팀이 휴지기를 갖는 동안 멤버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계발에 힘썼다. 문혜원은 뮤지컬 배우로 변신해 ‘헤드윅’, ‘노르트담 드 파리’, ‘서편제’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드러머 엄진용은 가수들의 음반과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했으며, 베이시스트 안재현은 영국에서 대중음악공연학과 석사 과정을 밟았다. 이교원은 “연습실에 벌레처럼 서식하면서” 미디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룹 초신성, 달샤벳 등의 음반에 편곡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교원이는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이뤄내는 친구에요. 대단하죠. 처음 팀에 들어왔을 때는 기타를 거의 못 쳤는데, 하루에 12시간씩 연습하더라고요. 요즘에는 멜로디를 만들 때 한계가 있다면서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지금은 아장아장 치는 수준이지만 1~2년만 지나면 잘 치게 될 거라고 믿어요.”(문혜원)
네 사람이 다시 뷰렛으로 되돌아 온 이유는 간단하다. 안재현의 말을 빌리자면 새로운 팀을 꾸리는 건 결혼을 한 번 더 하는 느낌이란다. 항간에는 해체설이 나돈 적도 있지만, 멤버들은 오히려 ‘다시 모였다’는 표현을 새삼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과 뷰렛을 꾸려야 했다면, (그 팀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지금 이 멤버들이 제게는 형제, 자매 같은 느낌이거든요.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제가 죽으면 영정 사진을 들어줄 사람들이에요, 모두. 그래서 이 친구들과 밴드를 하는 게, 제겐 굉장히 중요했어요.”(문혜원)
“예전에는 공연을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고 뷰렛이 더 위로 뚫어 올라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한 번 쉬고 나니까 무대가 우리에게 중요한 곳임을 깨닫게 됐습니다.”(안재현)
뷰렛처럼 멤버 교체 없이 긴 시간 팀을 이어온 밴드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문혜원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팀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의 뮤지컬 활동이나 안재현의 유학를, 멤버들은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응원을 보내주기까지 했단다. 문혜원은 “누군가 속도가 늦춰졌을 때, 그를 떼어내거나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속도를 맞춰주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늘 인터뷰마다 같은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U2, 에어로스미스, 롤링스톤즈처럼 할아버지, 할머니가 돼서도 뷰렛을 하고 싶어요. 멤버가 바뀌지 않은 채로 오래 가는 팀이 제가 생각한 성공의 기준이었고, 그 기준으로 우린 성공한 팀이에요.”(문혜원)
“한국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교의 실용음악과를 나왔는데, 정작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는 친구들은 거의 없어요. 이렇게 함께 편하게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게, 누가 알아주든 말든 제겐 큰 행복이에요.”(안재현)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외칠 수 있는 시절은 지났다. 20대 초반 만난 멤버들은 어느새 30대 중반을 향해 달리고 있다. “가늘고 길게 가는 팀”에게도 현실적인 원동력은 필요하다.
“어렸을 땐 마냥 음악이 좋았다면, 이젠 더욱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더그라운드가 됐든 오버그라운드가 됐든 밴드들이 더욱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차트 상위권에 올라가거나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할 수 있길 바라요.”(엄진용)
“예전에는 몽상가 같은 기질이 있었어요. 내 음악, 내 공연이 좋다면 그에 만족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가장(家長)이 된 느낌이에요. 밴드를 시작한지 15년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열정페이’를 받을 수는 없잖아요. 어렸을 땐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거나 아부하는 걸 정말 싫어했는데, 요즘엔 멤버들이 좋다면 많이 양보할 수 있어요.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고 할까요?. 차트 순위나 공연 규모 등등 각자 생각하는 자신의 꿈을 이루고 각자 만족할 수 있는 밴드가 되는 게 제 꿈이에요.”(문혜원)
하지만 본질을 놓치지는 않는다. ‘높은 순위’라는 미래의 꿈을 위해 뷰렛의 현재를 희생시키지는 않겠다는 포부다. 문혜원은 “대중성이란 결국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다. 그 수가 적다고 해서 고민하고 갈등하진 않는다. 내가 가장 나다울 때 멋져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꿈을 위해 현실을 망치는 밴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옵션을 위해서 본질을 바꾸는 건, 결국 방향을 잃는 것 아니겠나”고 반문했다.
“뮤지컬은 대본을 쓴 작가와 연출을 하는 감독의 입장을 대신 전달해주는 사람이 된 거죠. 장기의 말(馬)처럼요. 어느 날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나는 문혜원으로서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SNS에서 전직 뮤지션이 ‘뷰렛이 아직도 활동하는구나. 대단하다. 나는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는 내용의 글을 본 적 있어요. 밴드의 생명은 지속성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가늘고 길게 활동하고 싶습니다.” (문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