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탁 음악평론가]
장면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 단장 죽이기’. 소설 속 주인공 ‘나’는 음악을 좀 듣고 싶은 생각에 음반 가게에 들어선다. 그가 고른 앨범은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의 걸작 ‘The River’.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다. 주인공이 이 음반을 ‘굳이’ LP로 구입한다는 점이다.
그가 LP를 고집한 이유는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A면 마지막 곡인 ‘Independence Day’를 듣고 숨을 조금 고른 뒤 B면 1번곡인 ‘Hungry Heart’를 듣는 게 ‘제대로 된 감상법’이라는 것이다. 과연, 곡을 직접 들어보면 ‘나’라는 캐릭터를 경유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유인즉슨, 누가 들어도 ‘Independence Day’는 마무리하는 느낌을, ‘Hungry Heart’는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을 주는 까닭이다. 과연, 때로 내용에 앞서 중요한 건 형식을 갖추는 것이리라.
장면 2: 최근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데이비드 색스는 LP와의 재회를 아주 흥미롭게 전개해나간다.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음반숍에 들른 그는 그곳의 모던하고 깔끔한 인테리어에 먼저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미 이 때부터 속된 말로 지름신에 낚여버린 셈. 이후 그는 산책을 하던 중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반해 홀리듯 안으로 들어선다. 당연히 가게를 나선 그의 손에는 바로 그 곡이 실린 앨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Live at the Filmore West’가 들려 있었다. 그는 기쁨에 겨워 춤이라도 추듯 집으로 돌아간 뒤 턴테이블에 놓고 이 LP를 플레이한다. 이거 참,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광경이다.
장면 3: 음악 비평가 배모씨는 자칭 LP 마니아다. 그는 인터넷으로 가끔씩 해외 주문을 하는데, 이번에도 대략 10장의 LP를 결제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LP를 받고 음악을 감상한 뒤 이내 실망하고 만다. 그 중 제대로 된 음질로 구현된 것은 불과 3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LP들은 디지털 파일을 그대로 LP화한 것에 불과해 정말이지 얄팍한 소리를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 비싸기까지 했다. “이럴거면 차라리 CD를 사는 게 낫지.” 배모씨는 요즘 자신의 취향 유지에 심대한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위에 언급한 장면 3개는 LP붐의 현재와 한계를 정확하게 대변해준다. 기실 모두들 LP에 주목하며 그것이 ‘대세’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전체 시장 지분으로 환산해보면 LP 판매는 10퍼센트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대신 LP는 뮤지션들에게 유리한 매체다. ‘장당 이익’이 스트리밍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기 때문이다. 일례로, 잭 화이트(Jack White) 같은 뮤지션은 아예 레이블을 차리고 아날로그 LP만 전문적으로 발매하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물론, 그는 진짜배기 뮤지션이기에 장면 3에 거론한 ‘모양만 LP’ 같은, 사기나 마찬가지인 앨범 따위는 절대 발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메이저 음반사들은 이 폭주 기관차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돈이 원하는 건 더 거대한 돈이기 때문이다. 물욕은 한번 시동이 걸리면 어지간해서는 멈추지 않는 법. 디지털 파일을 그대로 커팅한 싸구려 LP들은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앞으로도 계속 발매될 것이다. 해외 기사에 따르면 새로 발매되는 LP의 80 퍼센트 정도가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다고 한다. 화가 날 일이다.
생활의 팁, 전해주겠다. 만약 LP에 갓 관심을 갖게 된 독자라면 사고 싶은 LP의 소스가 ‘오리지널 아날로그 테이프’인지부터 확인하면 된다. 만약 아니라면 그냥 관리 잘 된 중고 LP를 사는 게 백배는 낫다. 최근 발매된 LP들 중 하나 추천하라면 라디오헤드(Radiohead)의 1997년 걸작 ‘OK Computer’의 20주년 기념반 ‘Ok Computer’(OKNOTOK 1997-2017)을 꼽겠다. 위에 말한 ‘오리지널 아날로그 테이프’를 리마스터링한 것으로 끝내주는 사운드 퀄리티를 자랑한다.
국내에서는 조동진의 최신 앨범 ‘나무가 되어’의 LP가 최고다. 이 외에도 외국보다는 한국에서 제작하는 LP들이 훨씬 더 섬세하고, 훌륭한 소리를 들려주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중고 LP 관리는 일본이 세계 1위다. 게다가 중고 LP 시장도 엄청나게 크다. 내가 1년에 두세 번씩 일본에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