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방송되는 KBS1 광복절 특집다큐 '옥바라지, 그녀들의 독립운동'에서는 서대문형무소 건너편 일명 ‘옥바라지 골목’에 스며있는 조선 여인들의 독립운동 이야기 독립투사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기록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고,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그녀들의 독립운동을 발굴한다.
일제는 형량과 노역강도에 따라 수감자들의 식사량을 9등급으로 세분했다. 독립운동으로 수감된 ‘사상범’에겐 5등급 이하, 즉 한 끼에 270g, 하루 764kcal 이하의 식사만 제공했다. 성인의 일일 권장 칼로리가 2000~2500kcal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양실조 수준의 배식이었다. 겨울엔 방한복을 지급하지 않아 동상으로 손발톱이 떨어져나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거기에 끔찍한 고문과 노역이 보태지니 수감은 그야말로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 큰 문제는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는 감옥 안에서의 의식(衣食)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것. 감옥에 잡아두고 밥을 주지 않으니, 가족들은 감옥 주변에 머물며 사식과 옷가지를 넣어주는 옥바라지 생활을 몇 년이고 계속했다. 그들이 옥바라지를 끊으면 내 가족이자, 구국 영웅들의 목숨줄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인왕산 밑자락의 허허벌판,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1908년 일제가 서대문형무소를 만들고 그 건너편에 여관과 식당들이 들어섰다. 문학작품 속 옥바라지 골목의 풍경은 ‘감옥밥 파는 집’, ‘형무소 피고인 차입소’ 같은 간판이 즐비한 을씨년스러운 골목이었다고 한다. 손님은 대부분 독립운동가의 가족. 누구는 집을 얻고, 누구는 여관방에 머물며 옥에 갇힌 독립 운동가를 돌봤다. 굵직한 시국 사건이라도 터지면 옥바라지 골목은 그야말로 눈물의 문전성시. 여관방을 못 구해 생면부지의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면 말없이 방을 내주던 곳이기도 했다.
역사의 아픈 기억이 배어있는 옥바라지 골목은 독립운동 사적지이기도 할 터인데 이제 그곳은 사라지고 없다. 재개발 열풍과 함께 드높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골목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옥바라지 골목의 일부였던 무악동 46번지 일대(일제강점기 당시 현저동) 또한, 2019년 1월 아파트 입주로 사라지고 없다. 건설사가 내준 작은 땅에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라는 정말 작은 집이 한 채 있을 뿐, 옥바라지 골목의 기억은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 목포대학교 서동천 교수
“현진건의 '적도', 박태원의 '낙조',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문학작품 속에 기록된 옥바라지 골목을 살펴보면 옥바라지 골목과 사람들이 보입니다.”
- 교통대학교 권은 교수
“현저동 29번지는 강우규 열사의 가족들이 머물던 사식차입소 겸 여관이고, 현저동 45-29번지는 여학생만세운동의 주동자 최순복의 하숙집입니다. 당시의 신문, 검사신문조서, 간수 회의록 등 문서들 속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 역사문제연구소 전영욱 연구원

“아들 모양은 더 말할 수도 없이 참혹하게 되었으니, 어미 된 마음인들 얼마나 아프리오. 그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미까지 저를 책망한들 공연히 마음만 상할 뿐이라...그곳은 사지라 주야로 축수하며 면회 날이면 비바람을 무릅쓰고 한결같이 가서 면회를 했다.”
-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내이자 이규창의 어머니로 살아낸 이은숙의 회고록 中
“가정의 은택을 맛보지 못하는 문경에게, 가장 유효한 시기에 품행에 대한 조언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아버지는 장소의 불길과 편지의 부자유도 불구하고 이 편지를 써서 보내오니 부디 잘 이해하고 깊이 명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 일제강점기 최장기수로 무려 19년을 복역한 독립운동가 정이형이 딸에게 보낸 옥중서신 中
“모월 모일에 봉천 역을 지나가게 되었소. 아이를 낳았다는데 얼굴을 보고 싶으니 기차역에 나와 주면 좋겠소.”
- 독립운동가 김병농 목사의 아들 김태규가 아내 박애신에게 보낸 마지막 쪽지
형무소에 갇힌 독립투사들이 옥사하지 않도록 무자비한 고문과 탄압에 무릎 꿇지 않도록 새까만 먹(墨)방에 갇혀 처절한 고독감에 홀로 좌절하지 않도록 감옥의 안과 밖을 필사적으로 이어주던 여인들의 독립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