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윤준필 기자]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에 벌어진 12·12 군사 쿠데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인 만큼, 대부분의 캐릭터 이름이 실존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배우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은 다르다. 모델이 되는 실존 인물이 존재하지만 이름으로는 유추할 수 없다. '군인이라면 이래야 하지 않을까'하는 김성수 감독의 상상이 반영된, 상당 부분이 창조된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 감독은 이태신의 꼿꼿함을 정우성에게서 찾았다. 정우성은 전두광(황정민)을 비롯해 모두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서울의 봄'에서 홀로 분을 삭이며, 침착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태신 장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열연 덕분에 '서울의 봄'은 30일 기준 누적 관객 271만 명을 돌파하며, 얼어붙은 극장가에 봄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비즈엔터와 만난 정우성은 쏟아지고 있는 호평에 기뻐하면서, '서울의 봄' 이태신을 연기하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또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에 이어 다섯 번째로 협업한 김성수 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Q. '서울의 봄'이 개봉 후 8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기분 좋다. 언제나 응원하고, 지지하는 김성수 감독님과 오랜만에 찍은 작품인데,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 무척 기분이 좋다.
Q. '헌트'(2022)와 비슷하게, 같은 인물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헌트'에서 연기한 '김정도'와 시기적으로나 내용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거절했다. 관객들에게 이태신을 이태신으로 인식시키는데, 내 전작의 캐릭터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독님이 새로 짜놓은 판에 그런 부담을 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결정한 것은, 김성수 감독이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정우성이란 사람을 배우를 넘어 영화인으로 만들어준 분이다. '비트' 때부터 나를 현장에서 동료로 대해주고, 영화인을 꿈꿀 수 있게 용기를 주신 분이다. 당시 시나리오도 함께 고치고, 캐릭터를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묻고, 좋다고 격려해주셨다. 부족하지만 내가 쓴 글을 보여드리면 재미있다, 더 써보라고 말씀하셨던 분이다.
Q. 이태신은 실화 속 모티브가 된 인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
배우는 숙명처럼 어떤 캐릭터를 맡든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만약 감독님이 실화 속 인물과 싱크로율을 높여달라고 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배우는 해석하는 직업이다. '서울의 봄' 이태신은 감독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군인 상을 많이 투영한 인물이다. 나의 역할은 감독님이 만든 이태신이라는 인물의 상황을 해석하고, 연기하는 것이다. 실화를 재연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막연했다. 망망대해에서 안개를 헤쳐나가는 기분이었다.
Q. 캐릭터를 준비할 때 감독의 조언은 없었나?
처음 감독님이 참고하라고 보낸 영상이 과거 내가 UN 난민기구 친선대사 때 인터뷰한 영상이었다. 구체적으로 뭘 참고하라는 말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감독님이 미쳤구나 싶었다. 하하. 그 영상에서 이태신을 찾고, 고민하길 원하셨던 것 같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굉장히 조심스러운 편이다. 강요해서도, 감정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단어 선택도 신중히 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이태신에게 투영하길 원하셨다고 생각한다.
Q. 이태신은 정의로운 캐릭터인가?
명분과 정의를 울부짖는 인간으로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태신은 자기 할 일에 충실했고, 그 책임을 감당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물론 제삼자의 입장에선 그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게 작품에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이다.
김성수 감독님은 12·12 군사 쿠데타라는 무대를 만들고 이 영화를 연출할 때 선과 악, 정의를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 속에 놓인 인간들을 그렸을 뿐이다. 우리 안에는 육군본부의 장군들, 이태신, 전두광 다 내재해 있다. '서울의 봄'은 인간 모두 무고하지 않다는 냉소적인 시선,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가 담긴 영화다. 그게 우리 영화의 좋은 점이다.
Q. 황정민과는 '아수라'에 이어 또다시 맞붙었다. '아수라'에서의 황정민과 '서울의 봄'에서의 황정민은 무엇이 다른가?
전두광 분장을 하고 나오는데, 그 아우라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아수라'의 박성배(황정민)는 폭주에 설득력이 없는 순수한 악인이다. '서울의 봄' 전두광은 사심이라는 근거를 두고 폭주하는 인물이다. 인간의 사심을 간파한 연기가 화면을 뚫고 나오더라. 정민이 형은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을 제외하면 부딪히는 신도 많이 없었고, 연기로 맞붙으면 기 싸움을 해야 하는 힘든 상대다. 하지만 이번엔 정민이 형의 전두광을 관찰하고 싶었다. 내가 나오지 않아도 현장에 놀러 가곤 했다.
Q. 정우성과 이태신은 얼마나 비슷한 사람인가?
군복을 입은 이태신이 자신의 직무에 대해, 이 사태를 접했을 때의 감성이 정우성의 어떤 부분과 비슷할 순 있다. 하지만 나는 이태신일 수 없다. 이태신으로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이태신에 머무를 순 없다. 새로운 역할을 또 연기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태신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영광이지만, 그 영광을 뛰어넘는 것이 내 새로운 과제다.
Q. 감독으로서도 데뷔했는데, 김성수 감독을 통해 정우성 감독이 배우는 점이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감독상이다. 이게 내 마지막 작품일 수 있다는 마음가짐, 집요함과 끝없는 에너지가 해를 갈수록 경신하고 있다. 또 막내 스태프까지도 모두 동료로 대한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청춘인 감독이다.
Q. 김성수 감독이 이정재 감독보다는 내가 더 멋있게 정우성을 찍는다며, 이정재를 향한 경쟁심을 드러내던데?
건전한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멋있기 때문에 그런 경쟁이 가능한 것 아닐까. 하하.